징비록 - 피로 쓴 7년의 지옥.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치욕은 반복된다, 책 읽어드립니다
류성룡 지음, 장윤철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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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할 징(懲), 삼갈 비(毖). 기록할 록(錄). 지난 역사를 경계하여 미래를 대비한다는 의미의 징비록. 이는 조선 시대 유학자 유성룡이 자신이 겪은 전란을 기록하여 후대에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며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유성룡의 뜻을 우리나라보다 일본이 더 잘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TV에서 방송 도서로 나오기 전에는 딱히 빛을 발하지 못한 책이었지만,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로 우리나라에서보다 더 많이 읽힌 책이기 때문이다. 


징비록이라는 말이 어려워서 다가가기 힘들다고 느낄 뿐이지 사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매체를 통하여 당시의 일을 온몸으로 알고 있다. 대표적인 영화는 명량, 한산, 노량이 드라마로는 난중일기, 불멸의 이순신, 징비록이 있으며 책으로는 7년의 전쟁, 칼의 노래, 격류 등이 있다. 한국인이라면 징비록을 읽지는 않았어도 아마 이것들 중 절반 이상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 아직 징비록을 접하지 못한 분이라면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의 벽을 깨고 그냥 접해 보시길 추천한다.


류성룡은 문인으로서 과거 급제를 통하여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지면서 남인을 형성한다. 곁들여 하나 더 말하자면 이들의 반대 당파는 서인으로 이들이 갈라진 것이 노론과 소론이 된다.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우리는 사색당파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했으며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바탕을 마련해 준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당파싸움이 그치질 않아 등용과 파직 그리고 복관을 겪게 되며 이후 낙향하여 조정의 부름을 응하지 않은 채 저서 집필만 하며 여생을 보낸다. 


[원하옵건대 우리나라는 일본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소서]

-징비록 p.79 신숙주의 유언


책은 신숙주의 유언으로 시작한다. 역사적 배경을 지니지 않고 읽으면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태조부터 시작하여 이후 성종까지 약 100년 간과 이후 연산군과 선조까지의 100년으로 나누어 비교할 수 있다. 첫 100년은 강력한 왕권으로 문화의 꽃을 피우던 시기였으나 일본에 대한 자료 조사가 매우 활발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신의 횟수로 따지면 60회 정도. 그러나 이후 100년은 200년간의 평화로움 덕분인지 느슨하게 운영되는 조정이 일본에 파견된 사신단의 횟수가 겨우 5회에 불과했다. 신숙주는 조선시대 중 가장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세종대왕 때의 인물이다. 이 인물이 가장 힘 있고 안정적인 시대에 일본과 평화롭게 지내라는 유언을 남긴 것은 이후 임진왜란을 덧씌워보면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임진왜란 일본의 침략이 수월했던 이유 세 가지>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사라지지 않고 이후로 300년의 명맥을 더 이어온 것의 신기함이었다. 아마 이 책을 접하시는 분이라면 다 느끼겠지만, 처음엔 당쟁만 일삼고 무능한 관리들에게 화가 나지만 나중엔 그냥 체념하여 당연하게 받아질 정도로 어이가 없어진다. 세 가지만 소개하면 바로 공감이 될 것이다.


그 첫 번째는 임진왜란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 베스트 10을 꼽으라면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조령이라는 험난한 요새를 버리고 평원인 충주로 옮겨 패배한 장수 신립. 이것만으로도 무능력의 상징이 되었는데 본문에는 더한 내용이 나온다. 


[신립이 가까이하는 군관이 와서 적군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고 넌지시 알려 주었다. 이때는 4월 27일 초저녁이었다. 이 말을 들은 신립이 갑자기 성 밖으로 뛰어나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니 군대 안은 따라서 소란스러웠다. 신립은 밤이 깊어서야 가만히 객사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아침에 신립은 전날 밀고한 군관을 불러냈다.

"네 어찌 망령된 보고를 하여 군심을 소란케 하느냐."

신립은 그를 끌어내어 목 베어 죽이고 나서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다.

'왜적은 아직 상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징비록 p.123


사실 이때 적병은 이미 10리 바깥에 와 있었다. 도대체 정보를 준 그것도 평소에 가까이하는 군관이 전하는 첩보 사항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부족하여 굳이 죽여야 했을까?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군인의 수도 굉장히 부족한 상태였다. 결국 신립은 이들과 싸우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강물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것으로 충주 전투를 마무리했다. 


두 번째는 임금 선조가 피란 길에 올라 개성에 묵을 때의 일이었다. 이 부분을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한국의 국회의원들도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꽤 우울했다. 절대 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단 하나도 들지 않았다는 것이 더 놀라울 정도였다.


[저녁때 개성부에 이르러 남문 밖 관아에 임금께서 거동하셨다. 

그러자 대간들이 글을 연이어 올렸다. 

'수상(이산해)이 궁중 측근들과 결탁하여 나랏일을 그르쳤으니 탄핵하옵소서.'

그러나 임금께서는 윤허하시지 않았다.

5월 2일에도 대간들이 계속 글을 올리자 수상은 파직되었고, 내가(류성룡)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징비록 p.132


이런 일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파직과 임명이 이어지고 급기야 첫 번째 승리를 거둔 장군을 모함하여 참수하였으며 우리의 영웅 이순신을 백의종군하게 만드는 일까지 벌어진다. 평소에 당파싸움을 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라가 사라질 위기이다. 조선이 없어지면 관직이라는 것도, 양반이라는 신분도 사라지는데 이런 상황에 당파싸움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때 세 순찰사는 모두 문인이라 군사 일에 익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군사의 수효는 많았지만 훈련이 통일되지 않았고, 험한 요지를 찾아 지킬 준비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옛사람들이 "군사 일을 봄 놀이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바와 같았다.]

-징비록 p.137



마지막으로 소개할 것은 당시의 조선의 군사들의 실태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라가 위태로우면 문인이든 무인이든 전장에 나갈 수야 있겠다. 그러나 대장이라니! 결국 이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잡혀 죽거나 모두 달아나버렸다. 아마도 사대부 정신이 투철하여 문인을 우월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음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이외에도 군사들 중에는 제대로 된 군사는 없었으며 칼 한 번 잡아보지 못한 농민이나 노비들이 태반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세 가지>


​이런 상황에 드디어 이순신이 등장한다. 우리는 단순하게 각각의 해전에서 마스코트인 거북선을 이끌고 싸워서 이겼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순신의 전쟁은 이렇게 단순하게 볼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상황은 단 며칠 만에 왜군이 한반도의 절반 이상을 넘어 개성까지 쳐들어 온 상황이다. 즉, 육지에 일본군의  태반이 상륙해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이순신의 싸움은 단순히 왜군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육지로 보급할 물품을 끊어 이들의 손에서 무기를 없애고, 싸움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전투였던 것이다. 즉, 바다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임진왜란 승리의 절대적 역할이었다는 것.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알던 이순신 장군의 위엄이 훨씬 크게 다가온다.


여기에 보급로 차단 역할을 한 또 하나의 무리가 있다. 바로 의병. 이순신이 새롭게 바다를 통하여 들어오는 것을 끊었다고 한다면 이미 들어와 있는 것, 그리고 미처 막지 못하여 보급된 물품을 의병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서서 끊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혈관을 난도질하여 각종 기관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 전략으로 당시 군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우리나라에 맞춤형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승리의 요인에 꼽히는 의병의 활동. 임금 옆에서 피란만 다니며 당파싸움을 하는 이들과 의병들이 비교되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 요인은 어이없게 무능한 대신과 임금이 만들어주었다. 바로 너무 빠르게 피란을 다닌 것이 일본의 힘을 빼버린 것이다. 당시 일본은 빠르게 한양으로 돌진하여 왕을 사로잡은 뒤 조선을 속국으로 만드는 속전속결의 전술을 가지고 전쟁에 임했다.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는 이 전술이 잘 먹혔으나 막상 한양에 도착하고 나니 왕이 사라져 오히려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후 개성까지 왕을 사로잡으러 가지만 이미 왕은 다른 곳으로. 그 외에 임진왜란 발발 7개월 만에 명나라가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4월에 발생한 전쟁이니 한국은 11월이다. 보급품이 끊긴 겨울, 새롭게 투입된 명나라 군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왕의 꼬리는 일본군들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하게 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바야흐로 싸움이 급한 때이니 내가 죽은 사실을 알리지 말라."

-징비록 p.277


징비록의 처음은 신숙주의 말로 시작한다면 마지막은 이순신의 말로 마무리가 된다. 싸움이 끝난 뒤 명나라 장수 진린의 통곡을 보면서 무뚝뚝하게만 그려지던 이순신이 정쟁을 제외하면 꽤 사교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비록 그 방법이 사근사근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론>

사실 이것을 유성룡이 있는 그대로 썼다는 자체가 이미 자신의 허물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로 쓴 7년의 지옥을 미래의 후손을 위하여 썼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이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약 삼백 년 후 다시 일본의 침략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단순하게 일제 침략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상황에 대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총칼 없이 소리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징비록이 책 읽어드립니다에 방송 도서로 선정되어 방영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전으로 불리는 과거의 책들이 다 그렇듯이 이 책도 옛말과 한자어 그리고 역사적 배경의 부족으로 인하여 쉽게 접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스타북스에서 출간한 징비록은 도입부에 70페이지 정도를 할애하여 저자와 책에 관하여 세세하게 미리 알려주는 부분을 첨부하였다. 그리고 각 페이지 하단에 주석이 꽤 많이 적혀 있어 따로 자료를 찾지 않고도 이해하기가 쉬웠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로 알려진 징비록. 우리 선조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남긴 글이니 이제 우리의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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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 협찬을 받아 읽은 후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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