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와의 대화
로저 파우츠. 스티븐 투겔 밀스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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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침팬지와의 대화
로저파우츠 & 스티븐 투켈 밀스 저
허진 옮김 / 열린책들
독서기간_15일 (시간 날때마다 읽음)
책 추천도_ ★★★★★
추천이유_ 침팬지와 인간을 보며 다양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김.
                        
 
 '어떤 침팬지가 하루 종일 자식들 옆에 지켜 서서 견과류 깨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필요할 때에만 집중적으로 유도하는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중략) 엄한 훈련을 통해서 통제당하면서 습득한 행동은 유연하지 않다. 유연성은 영장류 지능의 핵심이다. 유연성이야말로 침핸지와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배운 기술을 전혀 다른 상황에 적용하도록 만든다. (중략) 그러한 언어적 도구를 다른 사회적 상황에서 사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가르치다'의 의미에 대해 내 견해를 쓴 적이 있었다.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Teacher' 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평행한 시소위에 올려진 채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Tutor'를 더 선호하는 입장이다. 이 부분도 이와 비슷했다. 가르침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봐주고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교육에 관심이 있고 교육 부분 중에서도 아이들의 개성,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 공부를 즐길 수 있는 마음에 관심이 더 깊은 내게 이 책에서 만난 교육의 일부는 더 반가웠다. 엄한 훈련으로 순간적인 부스터를 일으켜 좋은 효과를 단기간에 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간의 불은 오래가지 않는다. 모닥불을 지피듯 나무를 넣을 때도 하나씩 정성스레 넣을 때와 대충 던져 넣을 때의 불길이 다르듯이. 우리 아이들의 교육은 더 그렇다. (이 책을 읽은 후, 이제 우리 아이들과 침팬지로 주어를 변경해야하는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과거부터 인간우월주의를 당연시 여기지 않았나싶다. 딱히 인간우월주의를 지니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은연중에 당연시되고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동물에게 잘해준다고해도 그건 같은 생명체이기에 잘해주는 것이지 우리와 동일한 사람으로 보거나 우리보다 더 대단한 종이라고 평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잠시 1인칭 시점을 적용시켜보자. 일반 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지만 인정받지도 못하고, 지원도 못받던 당신에게 침팬지(워쇼)연구와 관련해서 예일 대학 교수직 제안이 왔다. 들뜬 마음으로 침팬지(워쇼)가 머물 공간을 둘러보는데 창살과 비좁은 공간으로 둘러싸여있고, 햇볕조차 들지 않는 곳이다. 워쇼가 머물 공간을 둘러본 당신은 예일의 제안에 대해 '당연 예일대인데! 수락이지!!'라는 반응인가, 아니면 '워쇼를 이런 곳에 둘 수는 없지. 아쉽지만 예일대 교수직을 포기해야겠다.'라고 반응하겠는가. 

 나는 둘을 저울에 올려둔 채 재고 또 쟀을 것이다. 나의 이익과 내 실험체로 보거나, 나의 이익이 아깝지만 내 가족으로 바라보고 포기하거나. 사실 이 입장도 제 3자로서 가상적 상황이기에 '이럴듯하다.'라고 입장이라도 밝히지 실제 상황이라면 어떻게 선택할지는 감히 장담할 수가 없다. 대부분이 이런 생각일 것인데 로저는 가족인 워쇼를 택했고 자신의 학문에서 권위라고 할 수도 있는 예일대 교수직을 포기했다. 그의 헌신이 후에 워쇼와 더 깊은 유대를 만드는데 긍정적 작용을 일으켰던 첫 시작이 이 뜻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물론 책에 나온 것처럼 로저에게 이 선택은 자신의 학문적 야망과 워쇼의 복지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하는 많은 순간들의 시작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앨리가 세례를 받던 행복한 날에 앨리의 양어머니(사람)가 했던 말이 다시, 하지만 이번에는 더욱 우울한 의미로 떠올랐다. <우리 아기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구원 받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우리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구원 받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종교와 관련된 '구원'의 의미로 앨리의 양어머니 입에서 나왔겠지만 내게는 그 구원이 종교적 구원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이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읽고 또 읽으며 구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었다. '구원.' 많은 구원들이 떠올랐지만 서평을 쓰는 지금에는 아프리카와 관련된 구원이 머리를 스친다. 양어머니와 함께 있던 앨리는 아프리카에서 포획되어 미국으로 건너온 아이이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그대로 두었다면 이런 구원보다 더 큰 구원이지 않을까...하고 가장 짧은 생각이었지만 그만큼 강렬했는지 이 한 문장이 떠오른다. 

 지옥 같은 곳에서 13년을 보낸 부이는 로저가 그를 찾아오자 관대하게도 그를 순수하고 쉽게 용서해주었다. 로저가 '이렇게 관대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처럼 나 또한 같은 생각이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관대한 사람. 사람이기에 관대함에도 제약이 있는걸까. 그 관대함 속에 내 속은 썩어나갈 수 있기에. 진정한 관대함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관대를 실천하고자 나아가는 터널이 너무나 힘든 과정일 것이다. 나 또한 학창시절에 진정한 관대를 실천하고 싶어 겉 관대를 실천하다가 실패하여 나를 알게모르게 혹사시켜버린 경험이 있기에 이 문구를 통해 그때를 되돌아 볼 수 있었다.

15장. 다시 아프리카로
정확히 15일. 이주하고도 하루 더 읽었던 이 책의 마무리 장이었다. 읽다가 감동받으면 한없이 세월아 네월아 하고 멈춰서서 생각해버리니 오래걸릴 수밖에^^;; 그래도 그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책이 좋은 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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