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는 동네의 딜레마, 젠트리피케이션 - 동네 토박이부터 개발업자, 세입자까지, 그들이 말하는 뉴욕
DW 깁슨 지음, 김하현 옮김 / 눌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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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울에서 일을 시작한 지 햇수로 5년. 출근은 9시까지, 퇴근은 6시 이후 상황 봐서. 야근의 기억이 심각하게 많지 않음을 다행이라 여기며 산다. 통근거리가 길어서 더욱 그렇다. 사는 곳은 성남이다. 대학과 군대 시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성남에서 보내고 있다. 성남하면 분당이나 판교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 동네는 그런 곳들과는 다르다. 동네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기는 (구)성남이다.

분당, 판교로 대표되는 (신)성남과 모란, 남한산성으로 대표되는 (구)성남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다. 두 구역은 모란역과 야탑역을 기점으로 즉, 현재 성남시청이 위치한 지역을 경계에 두고 둘로 나뉜다. 최초 성남은 서울의 위성 도시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노동자와 빈민들의 이주를 계획한 도시다. 산을 부랴부랴 깎아 만든 탓에 수많은 고개 사이사이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길목의 가파른 경로는 직접 걸어본 사람들만 알 수 있다.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문밖을 나서기가 두렵다. 위안 삼을 수 있는 점은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물에 잠길 일이 없다는 것 정도랄까? 고개들 만큼이나 주민들의 삶에도 곡절이 많다. 쉽게 말해서 못 사는 동네다. 90년대까지 여러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그 이미지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불법체류자들의 비율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것이 내가 사는 성남에 대한 이야기이며, 엄밀히 따지자면 (구)성남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분당은 (구)성남이 등장한 한참 이후에 형성된 동네다. 이곳은 90년대 신도시 건설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녹지 위에 아파트 숲을 세웠다. 80년대 후반까지는 개발 제한 구역으로 막혀있던 지역이었다. 평탄하고 깔끔하다. 강남의 부자들 중 많은 이들이 분당으로 넘어와 터를 잡았다. 주민들의 소득이나 학력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빼어난 학군이 만들어졌다. '천당보다 분당'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다. 이후 판교까지 가세하면서 더더욱 명성(그리고 집값)이 드높아졌다. 성남시라는 같은 행정구역 안에 위치해 있지만 (구)성남과 (신)성남의 격차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당신 앞에 서있는 성남 시민이 (구)성남에 사는지, (신)성남에 사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냥 "어디 사세요?"하고 물어보면 된다. (구)성남의 사람들은 자신을 성남 사람이라 답한다. 반면 (신)성남의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을 성남 사람이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당 또는 판교에 사는 사람이라 답한다. 실제로 내가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성남에 산다고 말한 사람을 본 기억은 손에 꼽는다. "에이 같은 성남이네?"라고 이야기했다간 일장 연설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구)성남의 사람들은 분당, 판교의 사람들이 유난을 떠는 것 같다며 힐난하고, (신)성남의 사람들은 같은 (구)성남과 같은 프레임으로 묶이는 게 탐탁지 않다. (구)성남 사람들은 성남으로 들어오는 각종 문화, 기업 시설과 상권들이 (신)성남 쪽으로만 집중되는 것 같아 시정에 불만이고, (신)성남 사람들은 본인들이 부담하는 많은  세금들이 (구)성남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빠져나가는 것 같아 시정에 불만이다. 물과 기름 같은 서로의 존재. 두 성남의 갈등은 오늘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재명 씨는 대권이 아니더라도 할 일이 많다.

성남은 역사가 짧은 도시다. (구)성남과 (신)성남의 형성을 주도한 것은 국가였지만, 이후 도시의 색채는 주민들의 자본력에 따라 결정되었다. 심지어 두 성남 간 삶의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지는 중이다. 책을 통해 보았던 뉴욕의 젠트리피케이션과는 조금 온도차가 있다. 도시의 중심지로부터 인접 지역으로 서서히 발전의 원이 넓어지는 것이 뉴욕의 이야기라면, 성남의 경우에는 원의 반을 뚝 잘라 한쪽 반원에서만 젠트리피케이션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자본이 도시로 침투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일 때 젠트리피케이션은 시작된다.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예술가들이 조성하는 분위기가 될 수도 있고, 중심지에 근접한 교통 조건일 수도 있으며, 혹은 학생들이 만들어 내는 젊은 에너지일 수도 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가치관의 주민들이 모여사는 미국에서는 아무래도 한국보다는 더욱 다양한 색채들이 뿜어져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성남의 문제점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에는 어두칙칙한 회색빛 이외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제2, 제3의 색채가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잠식된 서울 곳곳을 바라보며 동네들이 다 똑같아졌다 이야기한다. 시끄러운 관광객들, 프랜차이즈 식당들, 유명 브랜드 샵들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부러운, 그러니까 절대로 뜨지 않을 것 같은 동네들을 생각해보자. 뜨는 동네들은 획일화된 표정이라도 짓고 있지만, 절대로 뜨지 않을 것 같은 동네들은 표정 자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얼른 돈 벌어 (구)성남을 벗어나거나, 그렇지 않다면 (구)성남의 색채를 키워 나갈 수 있는 공동체를 알아보거나. "어디 사세요?" 하고 물었을 때, 당당히 성남에 산다는 사람을 마주치게 될 날이 올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는 또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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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학이 된 사나이
오한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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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는 대변(Dae Byun)의 약자일지도 모르겠다. 흔히 대소변을 가리다 할 때 쓰는 대변 말고 남의 말을 대신해주는 것. 그런데 사실 그것도 어쩌면 남의 똥을 대신 싸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과 문장이 똥과 다를 게 있으려나? 소설에서 오한기는 홍학을 대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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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세기
백민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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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나서 담담한 앵커의 목소리로 보도되는 분신 사건들이 더욱 슬퍼졌다. 타오르는 분노. 말 그대로. 나와 누군가의 삶을 순식간에 태워버릴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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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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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품질 테스트 중 제품이 동작을 멈췄다. 케이스를 뜯어내고 MCU 칩 위에 손가락을 올려보았다. 역시나 뜨거워져 있었다. 과전류. 어디선가 쇼트가 났거나, 아니면 전원 회로단 저항값 문제이거나 둘 중 하나. 답은 후자였다.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프로토 타입 개발을 진행하다 보면 비일비재한 일이니까. 나처럼 어리바리한 엔지니어가 설계한 회로의 경우는 더욱더. 열 번의 프로그램 시뮬레이션보다 한 번의 테스트가 더 중요한 이유다. 수땜으로 저항을 바꿔 달던 사수가 내게 말했다.

"PCB 기판에 붙어 있는 저항 소자 하나, 캐패시터 소자 하나. 이런 부품들을 보면 내가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알아? 내가 볼 땐 얘들이 딱 우리하고 똑같은 것 같아, 값이 0옴이든 1K든 간에 문제가 생기면 떼어내고 바꿔 달면 그만이잖아?"
"그러면 팀장님이나 임원분들은요?"
"그 사람들도 잘해봤자 LDO나 MCU쯤 되겠지. 저항보다 조금 비싸기는 해도 바꿔 달면 그만이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사실이었다. 회사는 그런 곳이었다. 버티지 못하는 사원이 발생하면 바꿔 달면 그만이었고, 타버린 임원이 있다면 그 또한 바꿔 달면 그만이었다. 기판 위에 배치된 이유를 부품이 제 스스로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아니 신경 쓴다 해도 뭘 어쩌겠는가. 포장 밖 세상도 보지 못한 채 서랍에 쌓여있는 부품들보다는 훨씬 나은 처지 아니던가? 나 또한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왔다. 적어도 붙어있는 동안만큼은 불만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불안이 있었다. 기판 위에서 언제라도 떨어져 나갈지 모른다는, 그렇게 버려진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을 것만 같은.

소설의 주인공 무오는 떨어져 나간 부품이었다. 무오의 불안을 한눈에 알아본 이부는 그의 쓰임새가 다른 판위에 있다며 그를 꾀어냈다. 무오의 쓰임새란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또 다른 부품들, 그러니까 소설의 표현으로는 도트(dot)들을 추적하는 일이었다. 직접적인 위협이나 그 어떤 폭력도 없이 그저 추적하는 일. 그뿐이었다.

이야기는 이부의 지시와 무오의 수행, 그리고 다시 지시로 계속 이어져 나간다. 지시와 수행의 틈새에서 무오는 자신이 자리 잡아야 할 위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용역인가? 노조인가? 아니면 다시 이전의 직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떨어져 나간 부품이 다시 기판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점점 커져가는 불안감 속에서 무오의 존재는 점차 희미해져만 가고, 무오가 쫓던 도트 또한 점차 광기에 휩싸여 간다. 

소설 속 문장들은 무척이나 건조했다. 사무적인 어투로 아무렇지 않게 툭툭, 마치 이부처럼 문장도 나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앉은 채로 읽지만 말고 무오의 뒤를 밟으라고 말이다. 따라간 그다음은? 물론 그다음 같은 건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도 그저 끈질기게 추적하는 일. 그뿐이었으니까. 

무오와 나. 우리 둘 모두는 주어진 지시 뒤에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가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며 읽고 있는 걸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소설은 이미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무오의 상태 역시 손쓸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고 있었다. 애초에 이 모든 결말을 예측하고 있었을 사람들. 이부와 최정화. 그들의 입가에는 잔잔하게 미소가 번지고 있으려나?

힘의 불균형은 보유하고 있는 정보의 차이에서 온다. 얼마나 더 알고 혹은 더 모르고, 아는 이에게는 여유가, 모르는 이에게는 불안이 주어진다. 모르는 이가 아는 이를 이기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모르는 이들은 아는 이들의 목적에 의해 끊임없이 시험당하고, 교체당하고, 버려진다. 설계자에게는 부품을 떼어난 이후의 계획이 있지만, 부품들에게는 떼어진 이후의 계획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현실 속 부품들(혹은 도트들,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시위를 한다. 버려질지언정 잊히고 싶지는 않다며 목소리를 모은다.

소설은 시종일관 침울했다.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처럼 한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여기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없다. 말 그대로 이야기만 남았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 독하다. 남았어야 할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사라지고 없다. 아는 이들은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고, 모르는 이들은 모르기 때문에 말하지 못 했다. 지금 여기에 있었어야 하는 사람들인데도 아무도 몰랐다. 누군가는 알면 다친다고 했다. 정말로. 모르는 게 다행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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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 오늘의 젊은 작가 4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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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광화문을 가득 매우는 수많은 촛불들에 대해, 불어오는 겨울바람과, 불어나는 국민들의 바람 중 어느 쪽이 더 강할지에 대해. 셔츠 맨 위 단추를 반드시 풀어둬야 하는지에 대해, 고은과 오은 시인에 대해, 몇 페이지 읽지도 않을 거면서 가방 안에 넣고 다니는 양장본에 대해. 이장욱 소설 『천국보다 낯선』의 A는 대체 누구인가에 대해, 그녀가 춤추는 동선에 나도 모르게 취해 있던 밤에 대해, (잠깐, 그런 밤이 실제로 존재하긴 했었나?) 혹은 그랬다손 치더라도 전혀 이상함이 없을, 지나가버린 어떤 시절들에 대해.

생각이 자꾸만 변해간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뻗어간다. 한때 나의 생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점차 세상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다. 어쩌면 나는 지금, "늙어가고 있습니다."하는 이야기를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 기록하고 있다. 서평도 일기도. 업무용 플래너에 적는 일정도 모두. 시절 속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 그 경계에 남은 것이 그저 몇 줄 글자뿐이라는 게 때로는 측은해진다. 그게 너무 쉬운 것처럼 느껴져서. 그건 너무 쉬워서.

어제는 시집을 읽다 말고 가만히 바라봤다. 얼굴 말고 거울을. 사포처럼 까끌까끌해 보이는 턱밑이 지난 한 주간의 피로를 대변하고 있는듯했다. 문득 『천국보다 낯선』의 '김'이 떠올랐다. 그 시간 나는 왜 책상에 앉아 '김'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최'나 '정'이 아닌, '김'이 먼저 떠오른 것은, 그가 나의 A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기 때문인데...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문장들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어졌다. 책을 덮는 순간 밀려온 기시감. 무언가에 홀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저런 씨팔놈이,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52페이지의 그 욕설처럼, 내 눈은 분명 많은 글자를 읽었지만, A에 대한 단서들은 쉽사리 기억나지 않았다. 매번 이런 식이다.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A는 대체 누구인가? 질문이 한참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낯선 작가의 낯선 소설이 남긴 수수께끼. 답 없는 답을 찾아 헤매는 사이 계절은 시나브로 겨울이었다.

A는 죽음 아닌가? 사랑이지, 첫사랑! 절대자? 나의 판정은 매일같이 변해갔다. 어떻게 읽어도 다 맞는 말 같았지만, 어떻게 읽어도 다 틀린 말 같았다. 미지수 A와 방정식 사이에는 공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글을 적는 시점에서, 그러니까 지금의 A는 '지나간 과거의 나'로 추정한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 결국 너(지금의 나)도 나(과거의 나)처럼 과거로 묻히게 될 것이라는 부름. 모든 건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나와 나들의 대화. 그렇게 생각하면 이 소설은 조금 더 무서워진다. 고작 몇 시간 뒤면 나를 잠에서 깨울 알람만큼이나.

아침이 밝아오면 A는 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영화와 달리 소설에는 엔딩 크레딧이 없다. 덕분에 BGM도 생각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간다. 레이첼 야마가타여도 좋고, 스크리밍 제이여도 좋다. 아무 곡이면 어떠한가. 떠오르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글의 끝에서 이렇게 아무 말이나 적으면서, 맨 처음 쓰고자 했던 글의 전개를 떠올려본다. 다행이다. 기록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기억나진 않는다. 어쩌면 첫 글자를 타이핑할 때부터 나는 글이 이렇게 흘러갈 것임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고 내 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과거의 나뿐인가 싶어 괜스레 또 측은해진다.

지금의 나에게는 과거의 내가 조금 낯설어서, 살짝 이상한 사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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