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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글러, 땜장이, 놀이꾼, 디지털 세상을 설계하다 - 세상을 바꾼 괴짜 천재의 궁극의 놀이본능
지미 소니.로브 굿맨 지음, 양병찬 옮김 / 곰출판 / 2020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클로드 섀넌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원제는 A Mind at Play인데 번역된 제목은 한국 독자의 시선을 단숨에 끌기에는 너무 긴 것 같다. ‘놀이하는 천재 – 디지털 세상을 설계하다’ 정도가 좋지 않았을까?
마지막까지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책의 맨 뒷부분에 나온 저자들의 ‘감사의 글’에서도 밑줄 칠 부분이 여럿 나온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기에 앞서서 그 근원을 이해하지 않는, 또는 최소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실례라고 잔소리하는 느낌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라고 대놓고 얘기한다.
섀넌을 대중에 널리 알린 인물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1953년 12월 경제지 ‘포춘’의 과학기술 담당 편집자 프랜시스 벨로가 섀넌의 ‘정보이론’에 관한 해설 기사를 과감히 실었는데, 벨로의 기사 도입부를 보면 이 책 저자들이 왜 벨로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다.
‘위대한 과학 이론은 위대한 교향악이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가장 자랑스럽고 진귀한 창조물이다. 과학 이론이 다른 창조물과 구별되고 어떤 의미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세계관을 심오하고 신속하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관을 심오하게 신속하게 변화시키는 것에 어찌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으랴?
이 책의 저자와 벨로 뿐만 아니라 섀논 자신도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인 동시에 가장 긴 대중 연설이었던 교토상 수상연설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윈, 뉴턴, 베토벤 등의 사상과 혁신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업적은 역사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파급효과가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섀논은 정보를 비트(bit)라는 단위로 정의하여 측정 가능한 양으로 나타내고, 통신 공학의 혁명을 가져온 정보 이론(information theory)을 탄생시켰다. (물리의 역학도 힘과 속도 등을 측정 가능한 양으로 정의하여 단위가 결정된 이후 발전 가능했다.) 책의 중간 부분에서 설명하고 있는 섀논의 기본적인 이론은 대학 교재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따라서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책의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책에서 안 사실이지만 섀논의 석사 논문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불 대수(Boolean algebra)를 회로(스위치)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석사 논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는 것인데, 모든 디지털 컴퓨터의 기본 개념이 되었기 때문이다. 섀넌이 21살 때의 일이다. (그의 일대기에 대한 연표가 포함되어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약간 아쉽다.)
인상적인 것은 천재의 일생에서는 좀 어울리지 않게도(?) 그가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는 흔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말년에는 알츠하이머를 앓았고, 결국 꽤 긴 시간 동안(1993~2001년)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정도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것 같다. 이 정도는 특별해 보일 것도 없지만, 워낙 천재성을 드러내며 살아서인지 인생의 끝은 누구나 비슷하구나 라는 쓸쓸한 감정이 책을 덮고서도 꽤 오래 남았다. (요양원 직원들이 소일거리로 그에게 간단한 산수문제를 내주었다고!!)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앨런 튜링은 비극적으로 삶을 끝내게 됨으로써 일반 대중들이 그에 대해 더 관심을 많이 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부모나 가족과의 갈등이나, 동료나 상사와의 심한 경쟁과 시기, 세상과의 불화 등 어느 것 하나 심하게 겪지 않은 행복한, 그럼으로써 자신의 재능을 다 드러낸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짧은 기간의 첫 번째 결혼에 실패했지만, 이것이 그의 인생에 어떤 타격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후 같은 직장에서(벨 연구소) 만난 베티 무어와의 두 번째 결혼으로 그의 인생은 더욱 생산적으로 되었다. 사람들이 베티와 그의 필적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연구에 아내가 많은 도움을 주었고, 말년에는 아내(베티)가 해준 음식 외에는 잘 먹지 못했기 때문에 해외로 초청받아 떠나는 여행이 부담스러웠다니 남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내조를 받았던 것 같다. (첫 번째 결혼 실패 후 몇 년 동안의 독신생활 때는 뭘 먹고 살았다는 말인지....)
또한 그는 바네바 부시와 손턴 프라이 같은 훌륭한 멘토이자 후원자, 직장 상사를 두었다. 바네바 부시는 그를 발탁하여 MIT에서 학위 논문을 지도하고, 박사학위 과정 때는 그를 전혀 다른 분야(유전학)에서 훈련과정을 거치도록 하였으며(바네바 부시는 ‘전문화는 천재의 무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 벨 연구소의 수학 팀을 이끌던 프라이 역시 섀넌이 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관심사에 몰두할 수 있도록 적극 지지해 주었다. 물론 당시 벨 연구소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와 같이 제도적으로 인재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벨 연구소는 그의 평생 직장이었으며, 놀이터였고, 지적 스파링을 할 동료들이 넘쳐났다. (나중에 벨 연구소를 떠나 MIT의 교수직을 수행할 때도 벨 연구소는 그의 이름을 남겨두고 계속 임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자신의 천재성과 주변의 훌륭한 인물과 환경, 그리고 시대적 배경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전화 회사의 부설 연구소로 출발 벨 연구소와 달리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는 ‘동기 부여’가 부족하여 인재가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섀넌 자신뿐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이(튜링을 포함하여) ‘어떤 인공물’이 사람의 일을 대신 할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하며 그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했다는 것이다. 섀넌이 한참 활약하던 1940년대는 아직 트랜지스터도 채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시기인데 이런 생각을 여러 사람이 공유한 것은 경제적 이익을 넘어 서양 문화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실제 섀넌은 정보이론에 큰 업적을 남긴 이후에는 ‘체스 두는 기계’, ‘미로 찾는 인공 생쥐’ 등을 만들고 인공지능의 연구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