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문의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에 있는 애거서 여사의 스파이물 중의 하나. 사실 토미&터펜스가 나오는 스파이물들이 여사의 스파이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존 르 카레나 프레드릭 포사이스 류의 좀더 진지한 분위기의 스파이물을 더 선호하는 나로서는 애거서 여사의 스파이물들은 왠지 100%만족이 힘들었다- 스파이물 치곤 너무 밝은 분위기라는 것이 (주로 주인공인 토미&터펜스의 성격에 기인하지만)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토미&터펜스 커플의 이야기가 아니라 힐러리 크레이븐이라는 중년 여성이 주인공이다. 쓰라린 아픔을 겪은 그녀는 고국을 떠나 먼 이국에서 자살하려고 하는데, 그녀의 외모에 관심을 가진 기관 요원에 의해 '자살 대신 임무 수행 중 죽으시죠?'란 제안을 받는다. 그녀가 실종 과학자 한명의 아내와 특징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냉전 시대 세계 곳곳에서 우수한 학자들이 실종되고 그들의 행방을 찾으려고 초조해하는 영국 첩보 기관이 자살미수자를 스카웃하다! 상당히 기가 막힌 발상이지 않은가. 힐러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올리버라는 다른 인물이 되어서 죽음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이 작품은 여사의 말기 작품에 속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애거서 여사 작품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달콤한 연애도 거의 없고 (있긴 있지만) 삶을 보는 눈이 아주 현실적이란 느낌이 든다. 반전의 반전이 거듭되는 이야기 구조도 아주 마음에 든다. 등장 인물 하나하나,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복선으로 잘 짜여져 있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궁금증을 놓을 수 없다. 후기를 쓰는 입장으로선 반전이 많아서 내용을 말하는데 제한이 크다는 단점이 되겠다. ^_^ 간단히 결말을 언급하면 올리버는 힐러리로 돌아오고 다시 삶에 대한 열정을 찾는다.
내가 읽은 애거사 여사의 스파이물 중에서 최고라고 꼽고 싶다. 물론 개인 취향에 따른 것이지만 말이다.
사족) 어딘가 007 시리즈의 느낌이 드는 것은 플레밍과 여사가 같은 영국인이어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