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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속의 거미 ㅣ 블랙 캣(Black Cat) 4
아사구레 미쓰후미 지음 / 영림카디널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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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자의 실루엣은 돌 속에 범람하는 소리에 싸여 녹기 시작했다. 여자의 팔이, 발이 수증기가 된 소리와 함께 섞여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여자는 돌 속의 소리를 습기처럼 빨아들여 물이 되어 어둠 밑으로 덩어리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다치바나는 여자가 사라지기 전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어둠 속에서 사지를 움직였다. 그러자 소리가 났다. 발밑에서 바스락바스락 꿈틀거리는 소리. 거미였다. 긴 발을 돌 벽에 부착시키고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는 거미. 출구를 찾아 몇 번이고 위로 아래로 헛돌고 있는 거미. 발밑 소리는 거미가 내는 것이었다. 내가 거미가 된 것일까? 출구 없는 돌 속에 갇힌 거미가 된 것일까? 다치바나는 어둠 속에서 우울하게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젠 어디로도 탈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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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여있는 책중에서 집어든 것이 이것. 신기하게 술술술술~ 읽히는 책이었다. 재미있어서 손에 잡으면 놓기 힘들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술술 읽힌다. 읽으면서도 뭔가 이상한 느낌. 이게 왜 이렇게 술술 읽히나 생각이 들었다. (--??)
설정 자체가 매우 특이하다. 새집에 이사가기로 계약하고 나오다가 교통사고 당한 다치바나라는 악기수리사가 주인공이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청각이 매우 과민해진 다치바나는 새 집의 전 거주인인 여자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집에서 그 여자의 삶의 흔적을 '듣는다'. 반복된 소리는 물질과 공간에 흔적을 남기고, 그 물질과 공간으로부터 과거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녀에 관한 소리는 다치바나가 노력을 기울여서 '듣는' 소리이고, 그 외의 소리는 다치바나에게 '들리는' 소리다. 다치바나의 예민한 청각엔 세상은 시각화된 청각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작가 아사구레 미쓰후미는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솜씨로 '공감각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모든 소리는 형태를 가지고 그 형태는 독자가 보기에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청각의 시각화'가 내가 보기엔 이 책의 거의 전부인 듯하다. 이걸 빼고 나면 상당히 진부한 스타일이 되니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악기수리사가 상상 속 여인을 좇아간다. 그녀에게 자신을 대입하여서. 그리고 결국 현실로 돌아오길 거부하고 환상의 여인과의 삶을 택한다. 이러한 플롯은 '청각의 시각화'를 위한 수단으로 정도로만 느껴진다. (물론 수단으로서 훌륭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인정한다.)
참. '2003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으로 환타지와 하드보일드가 결합된 새로운 감각의 추리소설'이라고 적힌 책띠의 광고문은 믿지 말라. '문학적'과 '새로운'이라는 문구는 진실에 가깝다고 느껴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