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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트리
오가와 이토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6월
평점 :
"이 이야기는 나와 릴리를 둘러싼, 같은 피가 흐르는 가족의 이야기다."
굳이 단서가 달린 문장을 읽지 않아도 막장 드라마 같은 가족 이야기가 아니라면 가족 소설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구나라는 것을 이 소설을 읽으며 또 한 번 느꼈다. 알면서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민감한 부분이 있고 밖에서 힘들었던 부분들을 가족이라서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냉담한 말을 쏟아냈던 기억들, 어느 가족에서나 보이는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을 글안에 담기란 매우 힘들다는 것을 가족 소설을 읽으며 꽤 많이 마주치게 된다. 아마 각자 좋아하는 가족 소설의 취향이 조금씩 다르기에 더할 텐데 워낙 가족 소설의 느낌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제목도 그렇지만 '오가와 이토' 작가님의 소설이었기에 더욱 지나칠 수 없었다.
높은 숲이 많은 소도시 호타카에서 '고이지 여관'을 하는 증조할머니 집에 부모님과 함께 사는 류세이, 그런 류세이의 유년 시절에 한 살 위인 누나 쓰타코와 동갑인 친척 릴리가 여름방학마다 고이지 여관을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기억들이 더해지며 초반에는 가족 소설이라는 느낌보다는 류세이와 릴리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새침한 듯하며 류세이가 부끄러워할 만한 말을 서슴없이 해대는, 여리고 눈물이 많은 류세이와는 반대로 여장부 같았던 릴리와 누나 쓰타코가 여름방학마다 이곳저곳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추억들은 셋이 사춘기를 맞으며 서먹하게 변해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류세이는 자신이 릴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릴리 또한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 년 중 여름만 찾아오는 릴리와의 만남, 그 소중한 추억들 속에서 성장해가는 릴리와 류세이는 그들의 사이를 눈치챈 부모님의 반대에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서로 만나지 않기로 약속한다.
3년 반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채 미래를 향해 전진해 대학에 입학한 류세이는 사랑하는 릴리를 다시 만났다는 것도 잠시 방황하는 청년기를 겪게 된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그려나가며 도약해나가는 릴리와는 달리 앞으로 뭘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없던 류세이는 잦은 말다툼을 하게 되고 어느덧 둘은 지치기 시작한다.
<패밀리 트리>는 류세이와 릴리의 성장 이야기를 담은 동시에 연애사를 담은 소설이다. 그렇게 가족 소설이 빛을 바래는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여관을 이끌던 기쿠 할머니와 스바루 아저씨가 화재로 잃은 여관 자리를 팔고 다시 산 쪽에 지은 펜션이 경영난을 겪으며 어린 시절 보았던 그들이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과 류세이가 알지 못했던 릴리의 가족사가 등장한다.
잔잔하면서도 기쿠 할머니의 삶에 대한 철학이 릴리와 류세이에게도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참 많이 뭉클했었다.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삶에 대한 지혜와 조급해하지 않는 철학들을 가르쳐 줄 어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얼마나 더 값지고 따뜻하게 살 수 있는지 기쿠 할머니를 통해 엿볼 수 있어서 릴리와 류세이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기쿠 할머니에게 더 깊은 감동을 받게 됐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