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산지 30년 된 빌라는 입구에 그보다 더 오래된 목련이 환하게 꽃망울을 터트렸다 추레한 모습으로 떨어지기까지를 몇십 번이나 반복했고 결혼을 해 두 아이를 낳은 동생이 집을 나가고 자신 또한 남자친구의 집을 오며 가며 흩어졌던 가족은 폭력에 노출된 동생의 귀환으로 다시금 빌라는 북적이게 된다.
경비원 일을 하는 아버지와 그에 못지않은 일을 하는 어머니, 어릴 적부터 자신보다 뛰어났던 동생이 일자리를 찾아 조금씩 안정적인 일상이 되어가던 중 주인공은 집에 묶여 여동생의 두 아이를 키우고 일하러 나간 엄마 대신 집안일을 하며 하루 종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다.
아침이 되어 어머니와 여동생이 출근하면 잠든 아이들을 깨워 아침을 먹이고 옷을 입혀 진이 빠진 상태에 겨우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밀려있는 집안일과 반찬 만들기에 하루가 가고 그렇게 아이들이 돌아오면 밥을 먹이고 씻겨서 재우기까지 또 한참의 시간을 들면 밀려있는 설거지와 다음날 먹을거리를 준비하느라 녹초가 돼버리는 나날들, 그랬기에 주인공은 자신을 위해주는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자신의 생활에 남자친구를 끌어들이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남자친구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함께 누워 잠드는 작은 사치는 안되는 일이라며 자신의 감정을 지워버려야 했다.
하지만 작은 소망조차 눌러버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보다 그동안 매일 해오던 필사를 할 수 없다는 게 더 힘든 일로 다가왔으니 에너지가 고갈된 몸으로는 필사를 할 여력도, 여유도 없는 나날들이 이어지며 주인공은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집안일을 해내고도 위로의 말 한번 듣지 못했고 그런 생활 속에서 정신적으로 지치는 것은 당연하고도 예견된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던 주인공이 글을 쓰고 싶어 했던 걸 눈치채 대학교를 보내준 여동생에 대한 부채감에 꾸역꾸역 그 모든 것을 버텨내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주인공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돼버린다. 자신이 다시 펜을 잡고 글을 쓸 수나 있을지, 자신의 능력은 여기까지인 것인지.....
이 소설은 그렇게 이어진다. 암담한 날들이 계속 이어지며 주인공이 다시 펜을 들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아직도 주인공은 인생이란 정류장을 지나고 있는 중이며 몇 개의 정류장을 지나쳤을 뿐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정류장을 만나게 될 수도 있고 꾸벅꾸벅 잠이 쏟아질 만큼 무료함이 느껴지는 정류장을 몇 개나 지나치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앞으로 남은 정류장이 얼마큼인지, 이따금씩 예정돼 있지 않은 정류장에서 내려야 할 일도 있을 수 있음을, 그 무엇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생이란 버스에 몸을 싣고 달려가고 있다. 저마다 목적지가 다르고 바라보는 곳이 다르지만 어쨌든 우리는 몸을 싣고 달려가고 있다. 그 무엇을 아직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어쩌면 그 자체만으로도 살기 위한 의미가 있음을 우리는 어느 순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