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부에 의한 성폭력 사건은 끊임없이 불거져 나오고 있으며 피해자의 대부분이 성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서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상습적인 성폭력에 시달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일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듯하다. 그저 사건을 바라보는 제3자의 시선이 이 정도인데 당사자는 얼마나 끔찍했을까, 얼마나 오랜 시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자책하며 고통에 몸부림쳤을까...
<여자 정혜>란 영화 속 주인공은 어릴 적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 후 그 기억은 정혜를 어둠 속에 옭아매며 틈나는 대로 그녀를 괴롭힌다. 원만한 연애나 결혼생활조차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을 범했던 친척을 죽이기 위해 칼을 준비하지만 결국 찌르지 못한 채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불편한 내용이지만 성폭행 피해자가 자기 파괴적인 감정을 보일 정도로 내면의 모습을 잘 나타내 특히 기억에 남았던 영화였는데 이브 엔슬러의 <아버지의 사과 편지> 또한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당했던 성폭행을 고발하는 내용을 독특하게도 딸이 아버지의 입장에서 편지를 쓰듯 써 내려간 글이라 기억에 강하게 남게 될 것 같다.
가장 보호받고 사랑받아 마땅하며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집에서 이루어진 고통의 낙인은 어린 이브 엔슬러를 옥죄었고 사랑스러운 딸아이를 향한 감정을 이성의 그것과 혼동해버린 아버지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용서받을 수없이 타락해버린 소아성애자일 뿐이다. 몇 년 동안 이어지던 그런 관계는 아버지의 행동으로 문을 닫아버린 이브가 자신의 방식대로 파괴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에 대한 관심을 거두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지만 태어나자마자 최고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대상에서 한순간 골칫덩이로 추락시켜버린 아버지의 태도는 가족에게도 그대로 전이되어 이브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존재가 돼버린다.
자기애에 푹 빠져있어 젊은 날을 보내고 느지막이 결혼했던 이브의 아버지는 어린 딸 이브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이브를 고통으로 몰아넣지만 애정을 한순간에 경멸로 담아 또 다른 고통에 몰아넣음으로써 딸에게 성폭행을 가하는 친부의 모범답안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런 기억들을 이브는 오래전 죽어버린 아버지를 림보에서 불러들여 모두 불태워 잊어버리고 싶었던 기억을 소환해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딸인 자신에게 글을 쓰는 형식으로 이 책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글을 읽는 내내 아버지의 말 같지도 않은 변명과 계속해서 드러나는 실체에 가슴이 떨려 숨조차 쉴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리고 만다. 이런 유의 소설을 읽을 때도 분노는 일지만 어차피 소설보다 현실이 더 막장이니까 그 강도가 크지 않았던데 비해 이 책은 작가가 겪었던 일을 아버지가 딸에게 고하는 고해성사식으로 풀어내서인지 읽는다는 게 고통 그 자체로 다가온다. 심장이 약하거나 평소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화병에 걸리지도 모르겠다. 독자가 이 정도이니 당사자는 어떠했을까.....
부모가 되면 아이가 자신이 잘못한 일을 변명할 때 상대방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이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지 당연하듯 교육하지만 정작 부모가 아이에게 잘못한 일을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진정한 사과를 받았다면 이브 엔슬러는 조금 더 자유로웠을까? 이런 질문조차 답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제발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