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니코 워커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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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 체리 / 니코 워커 지음

제목만 보면 십중팔구 새콤달콤하며 탐스러운 선홍색 과일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표지의 그려진 섬뜩한 해골 모양이 이런 느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책 제목인 체리는 성적인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접하게 되는 전쟁과 연관이 있다.

마약과 섹스에 절어 사는 주인공은 엄청난 부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자친구인 에밀리처럼 자신이 스스로 벌어 학비를 충당해야 하는 고학생도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하긴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 버텨내지 못하고 잘려도 그저 자신의 탓보다는 오히려 잘 됐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렇다 할 패기도, 열정도 없는 그의 삶은 소리 없는 무성영화를 보는듯한 지루함마저 느껴진다.

마약에 찌들어 흐리멍덩한 그의 뇌만큼 도대체 이 소설은 무엇을 전달하려고 그런 걸까? 싶은 생각이 내내 밑바닥 언저리를 맴돌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거창한 사명감이나 의무감 따위가 아닌 그저 즉흥적인 군 입대에 이른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이나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는 흔하고 입에 발린 말보다 그저 이게 아니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의 대답은 세계의 정의나 평화를 위해서라는 거창하지만 피부에 와닿지 않는 말보다 오히려 더 솔직해서 수긍이 갈 정도이다. 물먹은 솜처럼 내내 무기력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별 이유 같지도 않은 군 입대는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제일 활동적인 기록이라 할만한데 그렇게 위생병에 입대하여 부대에 배치되기까지의 이야기 속에서도 이라크 전쟁에 투입되어 다친 아군을 어떻게 치료하고 그에 상응하듯 가슴 뛰는 사명감 따윈 여전히 찾아볼 수 없어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반면 인간적인 적나라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게 위생병이 된 그는 이라크로 파병을 나가게 되고 함께 밥 먹고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 나누던 동료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며 아비규환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언제 적들에게 노출되고 공격당할지 몰라 늘 긴장 속에서 지내야 했던 주인공에게 이 전쟁의 승리 따윈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런 거창함보다 죽지 않기 위해, 동료의 죽음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마약으로 버텨야 하는 나날 속에 점점 그의 일상은 무너져내린다.

소설은 이라크 파병 이후 철저하게 망가져버린 주인공의 삶을 통해 전쟁의 잔학성과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전쟁 후유증도 함께 풀어놓는다. 많은 희생이 따르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희생이 뒤따라야 하는 것인지 자꾸만 되묻게 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안겨주었을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전쟁으로 인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건너버려 일상생활이 어려워진 그들에게 전쟁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묻게 된다.

마약과 술, 섹스에 젖어있지만 여자에게 무례하지 않으며 그의 심리를 따라가노라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와 진절머리가 나기도 하지만 명랑만화에나 나올법한 밝고 쾌활하며 능동적인 인간보다 쉽게 타협하며 무기력해지고 그저 되는대로 살아가며 현실에 묻어가려는 안일함을 가진 것이 또한 인간의 본성이기에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읽어내려갔던 것 같다.

언젠가 전쟁 후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마약에 길들여져 정상 생활이 불가능해져버린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프로그램을 보며 전쟁이 지나간 후의 예전의 일상 생할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두서없는 문장처럼 다가오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 읽으면서도, 책을 덮어서도 묵직함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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