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고 떠올랐던 건 중국 신수인 '기린'이었다.
뛰어남을 상징하는 만큼 상서롭고 신비함을 나타내 우리나라 문화재에서도 볼 수 있는 기린의 이미지가 소설 속에 어떻게 녹아있을지 더욱 궁금해졌다.
국회의원을 지내며 큰 교회를 일군 시아버지와 아버지가 일군 교회에서 목사직을 맡고 있는 남편, 그들을 내조하는 시어머니와 함께하는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은 전형적인 자수성가 타입으로 거기에 성직자란 이미지까지 덧씌워져 사람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습과 달리 이 집에서 서영의 존재는 그저 먼지처럼 가볍기만 하다.
타자기로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앳된 서영일 성폭행해 임신시킨 후 결혼을 했지만 남편의 집안에 발을 들인 순간 서영은 그들로부터 집중적인 폭행을 당하며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다. 이유랄 것도 없이 그날그날 그들의 기분에 따라 폭력의 수위만 조절됐을 뿐 맞다가 혼절하는 사태가 반복되고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란 생각에 친정에 도움을 요청해 보기도 했지만 엄마와 오빠, 언니는 시댁에서 받는 돈에 현혹되어 서영이 집안에서 끔찍한 학대를 당하는 것을 알아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집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기력한 생활 속에 서영은 점점 삶의 의미를 잃게 되는데 그나마 그런 그녀에게 쌍둥이인 지하와 지민이 위로가 된다.
하지만 매일 같은 폭력에 놓이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엄마를 보던 지하는 결국 자신을 찾지 말라며 가출을 감행하고 소설은 서영의 현재와 집을 나가 6년이나 소식이 없던 지하가 엄마의 과거가 담긴 소설을 출간해 작가로 데뷔한 이야기를 오고 간다. 동생 지민과 달리 지하는 청각에 문제가 있어 사람들과의 대화가 원활하지 않았고 학창 시절에도 그런 지하에게 선뜻 다가오는 친구가 없어 늘 외톨이처럼 지냈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순간 이동이라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지하는 어느 순간 보청기를 껴도 아무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친구들에게 눈을 맞추며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포기하며 이를 로그아웃이라 정의한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빛나는 시간은 엄마가 쓰던 타자기로 글을 쓸 때였고 순간 이동으로 저지른 범죄에 발목을 잡혀 한국의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을 때 전혀 알지 못하던 곳이지만 그곳에는 지하의 사진과 지하가 쓰던 것들로 추정되는 익숙한 것들이 발견되면서 소설은 독자들에게 또 다른 전개를 열어준다.
가정폭력에 무기력한 서영과 그런 가정환경으로 인해 늘 백일몽에 잡혀 있는 지하, 이야기는 중간중간 아리송한 이야기를 불쑥 꺼내놓으며 다양한 추리를 던져주는데 이 작품에서도 끔찍하리만치 처절한 가정폭력이 등장하지만 이미 황희 작가의 소설을 접해왔던 독자라면 이번 작품이 기존 작품에 비해 수위가 얼마나 낮아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절할 정도로 잔인하며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있을까 싶어 인간 상실을 선언하고 싶을 만큼 한없는 무기력을 전했던 그녀의 소설이 이번 작품에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다가왔기에 그녀의 더 넓어진 세계를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아 독자로서 신선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