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0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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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 나의 피투성이 연인 / 정미경 소설

오늘의 작가 총서 30번째 이야기인 정미경 작가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

나의 피투성이 연인, 호텔 유로 1203, 성스러운 봄, 비소 여인, 나릿빛 사진의 추억,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의 6개의 단편이 담겨 있는 이 책은 처음 등장하는 '나의 피투성이 여인'의 강렬함에 한참 동안이나 숨을 골라낸 후 가까스로 다음 편 이야기로 넘어가게 됐던 것 같다.

석 달 전 여름, 아직 서른다섯밖에 안된 남편은 한밤중 알 수 없는 곳에서의 운전 중 가로수를 들이받아 사망한다. 일곱 살 딸을 남겨둔 채 숨을 거둔 남편의 사고 현장을 찾았을 때 유선은 강 건너 불야성같이 이루던 모텔들을 그저 흘러가듯 바라봤을 뿐이었다. 작가였던 남편이 글이 써지지 않아 답답함을 털어버리려고 했다거나 약속이 있었더라도 그 대상이 여자일 것이란 생각을 유선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로서의 생활을 이끌어가기 위해 도서관 임시직 사서와 과외활동을 하며 갈치가 먹고 싶다던 딸아이에게 참치캔을 밀어주던 엄마의 고단함과 모정은 남편이 잠금장치를 해둔 비밀 형식의 글을 보았을 때보다는 심적 고통이 덜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죽은 지 백일을 향해가던 어느 날 출판사의 연락을 받은 유선은 마냥 거부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듯하여 출판사 직원을 만나게 되고 그 자리에서 남편이 그동안 내지 않았던 미완성 작품이나 연애시절 주고받았던 편지, 일기 같은 것들을 모아 출판을 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하지만 유선은 설사 남편이 남긴 글이 있더라도 그것은 남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일뿐더러 이제는 그것을 물을 남편도 곁에 없기 때문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출판사 직원은 계약금이란 하얀 종이에 백만원권 수표 다섯 장을 유선에게 준 채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다.

오백만 원이 자신과 딸 미진을 평생 부양해 줄 돈은 아니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함을 발밑에 둔 유선에겐 오백만 원이란 돈에 살짝 기대어 위안을 받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차에 과외 하나가 틀어지면서 유선은 남편의 노트북을 켰고 그가 그동안 썼던 글들을 훑어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4월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 형식의 글을 발견하는데 그곳에 Y와 M이 등장한다.

Y는 자신의 이름 유선일 테지만 남편은 Y에 대한 언급에 부채감 정도의 인상을 남긴데 반해 M으로 인해 인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아 보고 싶다는 베토벤이 사랑하는 줄리에타에게 남긴 말을 인용하여 남겼고 그렇게 7월까지 이어진 글을 통해 유선은 그동안 자신이 알던 남편의 이중적인 모습과 M에 대한 궁금증, 2년을 연애하고 7년을 함께 살았고 그 결실로 딸 미진이를 두었지만 함께하며 기억 속에 간직했던 모든 것들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듯한 그의 글 속에서 극도의 가려움이 시작된다.

환절기 탓도 아니었으며 면역력의 저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남편의 세계를 맞닥뜨린 순간 화마처럼 다가온 뒤엉킨 감정을 유선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것이고 점점 센 약물로 가려움을 진정시키는 것으로 애써 모든 것이 가라앉기를 바랐던 유선의 분노와 연약함은 남편의 죽음으로 그 어떤 답을 들을 수 없다는 현실로 인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남편의 죽음과 일기장을 통해 발견한 뜻밖의 배신으로 인해 결국 유선이 출판사 직원에게 어떤 말을 허게 되리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지만 그 누구보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남편의 배신과 차갑게 식은 김치찌개와 미지근한 밥을 혼자 먹고 잠들었을 딸에 대한 미안함, 갑작스럽게 찾아온 현실의 무게는 정미경 작가의 세심하고도 감각적인 문체로 더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누가 목을 조르는듯한 공포와 현기증을 마주하며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놓칠 수 없게 만들었던 <나의 피투성이 연인>.

다른 단편들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 더 가슴 절절하게 다가왔던 것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새 작품을 만나볼 수 없다는 부재감이 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기록에는 극도의 절제와 결코 절제할 수 없는 과잉된

정서가 행복하게 불화하고 있었다.

p.32

아아. 인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아 보고 싶다.

이처럼 세상이 아름다우니까.

이 남자는 누구일까.

4월부터 7월까지의 날들을 적어 놓은 이 파일의 기록자는 누구일까.

내가 알았던, 그 사람의 파일이 맞긴 한 것일까.

이 사람이 나와 함께 살고 아이를 낳고

웃고 때로는 울며 함께 살아왔던 그 사람일까.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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