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천천히 안녕
나카지마 교코 지음, 이수미 옮김 / 엔케이컨텐츠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엔케이컨텐츠 / 조금씩, 천천히 안녕 / 나카지마 쿄코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에게 치매가 찾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노희경 작가의 21년 전 작품이 리메이크 되며 화제를 모았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속 시어머니가 치매로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어머니는 그런 시어머니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점점 지쳐간다. 원하지 않았지만 찾아온 불치병은 나의 존재를 앗아가는 한편 가족에게도 그 힘듦이 전가되기에 드라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고통 앞에서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더랬다.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우리나라와는 정서가 다른 일본에서 비슷한 주제로 소설이나 드라마를 다룬다면 어떤 느낌일까 꽤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확실히 한국과는 다른 일본 특유의 정서가 느껴져 슬프지만 한편으론 유쾌하고 그러면서도 가슴 따뜻한 가족애를 느낄 수 있었다.

 

 

중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다 은퇴한 '쇼헤이'와 그의 아내 '요코',

이제는 하고 싶었던 취미활동을 하며 편하게 지내도 되겠다 싶은 찰나 쇼헤이에게 '알츠하이머형 인지증'이 찾아온다.

겉으로 보면 멀쩡해서 쇼헤이의 학교 친구들이나 이웃 주민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고 어쩌다 엄마의 성화를 못 이겨 집을 찾는 딸들의 눈에도 아버지의 인지증은 그저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아버지가 알츠하이머형 인지증에 걸린 지 3년 차 되던 해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는 알츠하이머형 인지증, 원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고 약을 복용해 진행 속도를 늦춰주는 것이 최선인 상황에서 3년 차가 지나면 그때까지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가족들은 아버지의 상태를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요코는 생물학자인 남편을 따라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큰 딸 '마리'와 가정주부인 둘째 딸 '나나', 푸드 스타일리스트인 막내 '후미'를 집으로 소환하여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게 한다.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알츠하이머형 인지증에 걸린 아버지가 조금씩 기억을 잃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곁에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점잖고 누가 말을 걸어도 응대를 잘해주는 통에 쇼헤이가 인지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가족이 아닌 사람들은 눈치채기 어려웠지만 점점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자고 보채거나 미국의 큰 딸 집을 방문할 때 창밖으로 보이는 해변을 자신이 자랐던 곳이라 생각하는 등 점점 단어와 장소의 혼동이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누군가 집에 아픈 사람이 있다.

그것도 자신의 일생과 몇십 년을 함께한 가족의 기억을 잃어가는 누군가가 집에 있다면 지금까지 누렸던 편안했던 삶은 되돌릴 수 없는 먼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러하기에 이런 주제의 소설이나 드라마는 우울하고 슬프고 힘겨울 수밖에 없다. 심지어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다 우울증이 오거나 정신착란이 왔다는 이야기도 봤던 터라 주제 자체가 주는 고통을 피해 갈 수 없는데 그럼에도 이 소설은 유쾌하다. 어떻게 인지증이란 주제로 이런 유쾌한 소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한국인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의 전환이 놀라웠던 것 같다.

사실 인지증을 앓고 있는 아버지로 인해 곁에 있는 어머니가 제일 힘든 상황에서 아버지가 사라질 때마다 급한 맘에 딸들과의 전화 통화가 자주 등장하는데 다급한 감정들이 티격태격하는 대화로 이어지는 와중에도 무거움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딸들은 아버지를 걱정하기는 하지만 애를 태우며 속상해하는 등의 모습은 지나치지 않는다. 역시 정서가 달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텐데 나는 그런 모습들이 오히려 더 좋게 보였던 것 같다.

이런 글을 보면 누군가는 직접 겪어보지 못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같은 상황에서 가족이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건 또 다른 면에서는 한번 고려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던 건 소설 속에서는 인지증을 앓고 있는 아버지 쇼헤이 곁에 아내인 요코와 세 딸들이 있지만 나의 경우엔 부모를 책임질 사람이 나밖에 없기에 앞으로 발생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는데 그래서 인지증 환자 이야기에도 이런 유쾌함이 있다는 것에 뭔가 깨달음을 얻게 됐던 것 같다.

자신의 기억을 잃어가는 것은 물론 가족과 함께했던 기억도 잃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도움은커녕 폐만 끼칠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라도 자신들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를 기억하고 오히려 오래전 기억을 꺼내 아버지를 다시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은 가슴 따뜻하고 잔잔하게 다가왔다.

좋아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해 더 기대를 모았던 영화 소식을 들었지만 원작을 읽은 후 보려고 아껴두었는데 원작이 예상외로 너무 재밌어서 영화는 또 얼마나 잔잔한 감동을 줄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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