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신앙을 다룬 단편집은 여럿 보았지만 단편이 아닌 장편에 무속 신앙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흔치 않아 더 뇌리에 각인된 작가 '박해로', 사실 그동안 무속 신앙과 관련된 영화나 소설은 다소 난해한 감이 있어 즐겨보지 않았는데 무속 신앙은 아니지만 일본 괴담을 바탕으로 한 '보기왕이 온다'를 읽은 후 한국 괴담이나 무속 신앙과 관련된 주제에 관심이 옮겨가면서 처음 읽게 됐던 작품이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 살'이었다.
괴담이나 원초적 공포심만을 자극하는 소설과 달리 무속 신앙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포의 질량이 다른데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가?'싶어 의구심이 들다가도 자극과 공포가 뒤섞여 쉽사리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전개에 책을 덮을 즘엔 한편의 영화를 본 듯한 충격을 받곤 한다. 이런 강렬함을 한 작가에게서 작품마다 받는 것도 쉽지는 않을 듯한데 호기심에 궁금하면서도 왠지 모를 두려움에 망설여지게 되는 것 또한 박해로 작가의 소설을 읽기 전 동일하게 느껴지는 감정 같다.
기성은 안정된 직장이라 불리며 청년들이 죽자 사자 매달리는 공무원이지만 웬만하면 정년까지 보장된다는 안정감과 달리 민원 창구에서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통에 하루에도 열두 번씩 사표를 날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언의 압박과 공포심을 조장하는 민원인들의 수위는 하루하루 높아져만 갔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기성은 치질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표를 던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자신만 바라보는 가족 때문에 기성은 맘 편히 하소연할 수도 없다. 그런 시달림 속에서 기성은 단 며칠만이라도 일상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에 연수를 신청했고 오랫동안을 기다려서야 연수원 교육 확정 전화를 받게 된다. 그렇게 연수원이 있는 경북 섭주로 향한 기성은 공무원 동기인 장준오와 재회하며 회포도 풀 겸 섭주 시내의 횟집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2차로 노래방을 향한 뒤 정신을 잃게 된다. 평소 주량이 센 편인 기성이지만 노래방에서 준 맥주를 마신 뒤 맥을 못 추며 의식을 잃은 것에 의아함을 느끼던 차에 전날 노래방에서 만난 도우미 주리와 핸드폰이 뒤바뀐 사실을 알고 연수가 끝난 후 만나 교환하기로 한다.
핸드폰을 교환하기로 약속한 장소에 주리 대신 나온 주리의 딸 시영을 본 기성은 격한 동요를 느끼게 되고 이후 이들의 만남이 우연처럼 거듭되면서 기성은 주리의 집에 초대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주리의 집에 초대된 날 기성은 시영이 자신의 대학 동기인 연진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에게 호의적인 연진의 태도에 오랜 연인인 화영이보다 더 마음이 기우는 것에 조금씩 혼란을 느끼게 되는데 문제는 연진과 별개로 주리 또한 기성에게 추파를 던지는 묘한 상황에서 기성은 점점 모녀의 손아귀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는데.....
'연진의 마음은 뭐고 연진의 엄마로 등장하는 주리는 또 왜 저러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싶은 궁금증이 내내 들러붙을 무렵 서서히 이들의 정체가 밝혀지고 이들 모녀 뒤에 존재하는 진짜가 등장한다. 그리고 역시나 강렬하고 자극적인 내용이 주는 몰입감에 영화 한 편을 옴팡지게 본 느낌은 이번 소설에서도 피해 가지 않는다.
조선시대 억울한 죽음을 맞았던 비운의 왕을 다룬 책을 보다가 무속인들이 단종이나 사도세자의 원혼을 즐겨 한다는 내용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어딘가에 전해내려오는 전설에 무속적인 살을 입힌 듯한 생생함이 느껴져 또 한 번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