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제르포'는 ITT 그룹 자회사의 임원이다. 육감적인 몸매의 아내와 두 딸을 둔 가장으로 한 달 동안 파리의 집을 비우고 외곽 해변가로 휴가를 갈 계획이다. 아내인 '베아트리스'와 펜션 문제로 조금은 다투겠지만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을 그들의 휴가는 며칠 전 제르포가 사고당한 자동차의 운전자를 병원에 데려다준 일이 발단이 되어 꼬이기 시작했고 심지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의 습격에 평범한 일상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1920년 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난 '알론소'는 도미니카 섬의 백인 엘리트 가문 출신인 '엘리아스'와 협력하여 비합법적인 일로 돈을 벌어들였고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지만 국가적인 혼란이 이들을 도와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고 친구가 정치적인 일에 휘말려 비참하게 내쳐질 때 알론소는 진작부터 돈을 빼돌려 드넓은 농지를 사들인 후 처절하리만치 철저한 고립 생활을 이어간다.
그리고 아무도 발을 들일 수 없는 알론소의 드넓은 사유지에 새빨간 란치아 베타 베를린 1800을 타고 다니는 어두운 양복 차림의 두 남자만 출입할 수 있었는데 이들과 그 어떤 접점도 없었던 제르포는 한밤중 운전하다 발견한 차의 운전자를 병원에 데려다줬다는 이유만으로 양복 입은 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돼버린다.
처음은 제르포가 가족과 떠난 휴가지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낼 때 다가온 두 명에게 익사당할 뻔했고 그들을 따돌리고 파리로 돌아온 후 갈 곳을 잡지 못한 채 고속도로를 달리던 제르포를 뒤쫓은 범인들과 주유소에서 재회하며 또 한 번 제르포는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되지만 가까스로 도망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해볼 틈도 없이 기차 안에서 만난 부랑자에게 지갑을 뺏긴 채 떠밀려 높은 산 중턱에서 그대로 굴러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불사신 제르포는 죽지 않았고 부러진 다리로 며칠을 걷거나 기어 숲에서 벌목하는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사람이나 동물들을 간호하는 일을 하는 라귀즈 하사를 만나 그의 곁에서 지금껏 해보지 못했던 사냥과 그 밖에 잡다한 것들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다친 다리도 다 나았지만 제르포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이미 범인과의 두 번째 만남이 있던 날 주유소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언론을 타며 자신은 실종된 상태로 처리된 상황에 그런 것들과 더불어 제르포는 왠지 그동안의 삶에서 떠나 불편하고 더럽지만 그런대로 홀가분하게 지낼 수 있는 지금 상황을 즐기는 듯하다.
<웨스트코스트 블루스>는 다국적 기업의 임원인 제르포가 퇴근하던 중 사고를 당한 차를 발견하고 의식을 잃은 운전자를 병원에 데려다준 일이 발단이 되어 원치 않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평생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영미권에서 보이는 범죄소설과 달리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고 왜 그래야만 했는지, 사건에 휘말린 희생자들이 불쌍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범인들의 인간미를 조금은 끌어내려 애쓰는 인정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짜임새 없이 되는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다가오지만 그래서 더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이미 초반에 제르포가 모든 사건을 끝냈음을 알리는 문장을 던져준 후 전개되는 내용임에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가독성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