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름의 재단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20년 6월
평점 :
해냄 / 여름의 재단 / 시마모토 리오 장편소설
2018년 <퍼스트 러브>로 159회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알게 된 작가 '시마모토 리오'
처음 읽게 된 <퍼스트 러브>와 얼마 전 읽은 <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 속에 공통된 주제인 성폭력은 <여름의 재단>에서도 등장한다. 다만 이번 작품에서 작가로 등장하는 '가야노 치히로'는 앞의 소설과 달리 강도가 덜한 성추행이란 사건을 겪지만 그렇다고 어린 시절 남겨진 성추행의 결과가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는 게 역시나 불편하게 다가온다.
출판계 일을 하는 아버지와 술집을 하는 어머니는 서로의 간극을 채우지 못하고 이혼한다. 치히로에게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쿨하게 짐을 싸서 나가버린 아버지와 술집을 하며 치히로는 늘 뒷전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늘 외로움을 지울 수 없었던 치히로.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살던 치히로는 어머니가 하던 술집의 단골손님에게 어릴 적 성추행을 당하며 그것이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에 종용당한다. 잘못된 것임을 느끼지만 어른의 교활함에 그것이 관심과 애정이라며 작은 희망을 가졌던 치히로에게 그 일은 성장하면서 내내 남녀관계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더 나아가서 자신은 육체적인 관계에만 이용당하다 버려지고 마는, 어쨌든 그렇게 되고 말리라며 체념하는 어른이 되고 만다.
출판사 직원이었던 시바타는 작가인 치히로의 글을 좋아한다며 앞으로 자신의 출판사와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내비친다. 그렇게 출판사 직원과 작가란 공적인 관계에서 뜬금없고도 불쾌하며 자기식대로인 시바타의 행동으로 인해 치히로는 불안감과 혼란을 느끼게 된다. 평상시엔 작품 이야기를 하며 평범한 회사원처럼 대하다가도 저녁 회식자리나 술자리가 끝난 후 갑자기 치히로에게 키스를 퍼붓는 행동에 그것을 애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인 치히로의 말에 갑자기 싸늘하게 대하는 시바타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 치히로는 불안한 감정을 넘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마저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매번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데도 시바타가 부르면 달려나가는 치히로를 보고 있노라면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답답함과 짜증이 느껴질 정도이다.
항상 제멋대로인 시바타와 그녀에게 애정을 표하는 이노마타, 라디오 출연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된 연하남, 할아버지의 집에서 가까이 사는 평론가, 비 오는 밤 찾았던 선술집에서 알게 된 출장남 등 우연치 않게 만나지는 남자들과의 별 의미 없는 만남은 그대로 육체관계로 이어지게 되고 상대방의 마음이 진심이건 아니건 간에 치히로는 어차피 사랑받지 못해 오래가지 못할 거란 생각에 잡혀 자신이 먼저 선을 긋는 것으로부터 조금은 마음의 부담을 덜고자 한다. 육체관계 때문에 치근덕거리거나 상대방을 옭아매는 것은 그녀 자신이 허락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방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 또한 품고 있다. 어쨌든 이 소설 또한 굉장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주제와 등장인물들의 감정선 때문에 치히로에게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녀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계절의 순대로 읽어가다 보면 불편한 만큼 너무도 현실적이며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현실에 비춰 비이상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너무도 만연하게 퍼져있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그릇된 시각이 치히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그로 인해 한 여성이 갖게 된 남성에 대한 인식과 결국엔 자신마저 믿을 수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것 또한 확실히 알 수 없게 되며 스스로 느끼고 싶어 하던 애정 또한 스스로 놓아버리게 되는 현실의 되풀이 속에서 묵직하고 싸한 아픔이 전해졌다.
만권이란 책을 집에 보관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집에 머물며 할아버지의 책을 재단해 데이터로 옮기는 일을 하게 된 치히로, 그리고 대학교 교수의 조언에 따라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어머니의 술집 단골 아저씨에게 복수함으로써 치히로는 할아버지의 책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까지 재단할 수 있게 되었을지, 그로 어린아이의 기억을 깨고 한발 앞으로 내디딜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