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이혼하여 더 이상 함께 살지 않는 아버지와 함께 간 이태리 식당에서 보았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이후 소년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 하나 두드러지는 일 없이, 어쩌면 거기에 그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게 당연한지도 모를 정도의 존재감인 그는 유년부터 이어온 뚱뚱한 자신의 외모를 바꾸기 위해 저탄고지 식단을 고집한다. 그리고 그의 곁에 친구인 B는 2대 독자인 집으로 시집와 첫딸을 낳은 어머니가 자기 바로 위의 누나가 죽은 지 얼마 안 된 이부자리에서 자신을 잉태하기 위한 육체적 교접을 이룬 것부터 자신은 잘못 탄생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뚱뚱했고 볼품없어 초라하다고 느꼈던 소년, 반면 아버지는 잘 차려입은 정장에 중후한 멋을 자랑하는 신사였으니 그런 아버지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에 소년은 더 움츠러든다. 그렇게, 어쩌면 그랬기에 아버지에게 버려졌다는, 사랑받지 못한 이유가 바로 비루한 살덩이에 있기라도 한 듯 오랜 세월을 이어온 DNA 운운하며 그렇게 탄수화물을 끊어내고 한 달 만에 12킬로그램을 감량한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으며 살 가망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그리고 독하게 탄수화물과 당분을 줄이며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그는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마주한다. 어린 시절 뚱뚱하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만 기억하는 아버지에게 지금 나의 모습은 보이지 못한 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기억하는 아버지에게 감량은 어쩌면 마지막 자존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버리고 갔지만 그렇게 뚱뚱하던 아니는 이렇게 잘 크고 있다며 상처 따윈 받지 않았다는 표정을 아버지에게 짓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끝내 그는 아버지의 기억에 지금의 모습을 심어주지 못했다. 비너스를 보면서 그는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멸시한다'라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주인공과 친구인 B의 유년시절은 순탄치 못하다. 어떤 방식이든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자신 내면을 뒤흔드는 상처의 깊이만큼 자신의 존재감 또한 매번 부정당하거나 쉽게 흔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날씨와 생활>에 등장하는 소녀 또한 아버지와 큰 오빠의 부재 속에 도시의 변두리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토요일 청소를 마치고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관람을 가기로 했던 그날 엄마가 24개월 할부로 사들인 세계문학전집 값을 수금하러 온 영업사원 때문에 결국 극장에 가지 못한다.
무언가 큰 사건이나 동요가 없는 흐름이지만 전집 값을 수금하러 온 영업사원과 집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소녀는 끊임없이 몽상에 빠져드는데 그런 몽상들이 소녀의 감수성이나 기발함을 나타내기보다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고 현재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소녀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비쳐 안타깝게 느껴졌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날씨와 생활', '지도 중독', '고독의 발견',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의심을 찬양함'이란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앞쪽부터 세 편에 연이어 B가 등장하고 있어 각기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 B 시리즈인가란 생각을 했었는데 단편마다 이니셜의 등장도 흥미롭긴 했지만 끝까지 이어지는 단편 속에 불편하지만 딱 꼬집어 말하기엔 뭔가 복잡하게 느껴지는 감정선들이 독특하게 다가와졌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잃어버린 것, 부정해버리고 타락해진지도 모른 채 앞으로만 나아가려는 인간의 모습들이 이런 이야기로, 이렇게 다양한 표현법으로 탄생할 수도 있음에 감탄이란 감정마저도 하찮게 여겨졌던 단편들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