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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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빌리스 / 분리된 기억의 세계 /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대망각' 시대의 정확한 시작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초신성 폭발이나 병행 세계의 간섭, 다른 시대의 침략, 상고 시대의 구지배자의 부활, 독재 국가의 실험 등 다양한 가설 중 제일 유력하게 재기되는 것은 핵을 실험할 능력이 없었던 국가에서 엉터리 이론에 따라 자행한 의사핵 실험이라는 견해가 대부분이었고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공간의 상전이 현상이 발생하면서 인간의 장기 기억은 불가능해졌다.

인간은 모든 일을 단기로 기억한 다음 그것을 장기 기억으로 넘기는데 '대망각' 시대의 도래로 인해 장기 기억이 불가능해진 인간들은 10분 후면 그동안 일어난 일을 잊는다. 대망각 이전에 태어나 뇌를 활용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 기억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지만 대망각 이후의 기억은 10분마다 리셋되었고 대망각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그나마 뇌의 활용은 꿈도 꿀 수 없을 정도여서 외부 기억 메모리를 인체에 주입해야만 기억이 가능하였으니 <분리된 기억의 세계>는 인류 대재앙인 대망각 사고 이후에 일어나는 인간의 혼란스러운 사건들을 다룬 이야기이다.

오후 8시 반, '유키 리노'는 일기를 쓰고 있다.

오후 9시 20분, 리노는 그전의 기억을 잃고 일기를 쓰고 있다.

오후 10시, 리노는 좀전까지의 일이 생각나지 않아 일기를 쓰지만 자신이 쓴 것이 분명한 앞의 글들을 보며 그동안 발현되지 않았던 자기 안의 다중인격이 나타난 것이라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같은 시간, 아래층 거실에 있던 엄마는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며 반복해서 눈물을 짓고 있다.

동시간 원자력발전소, 리노의 아빠는 냉각수로 이용되는 바닷물에 걸린 오징어를 동료와 걸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미 휴식시간이 2시간이나 지난 상황에 정신을 차려 사무실에 들어가니 모두들 자신처럼 기억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잃어가는 기억 속에서 발전소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대망각 이후에 태어난 '히로타 테쓰지'는 지하철역에서 급하게 내려오다 누군가와 부딪쳐 순간 정신을 잃는다. 다시 깨어났을 때 부딪친 사람은 서둘러 자리를 떠난 후였고 다행히 근처에 있었던 중년 부인의 도움으로 떨어져 있던 메모리를 신체에 삽입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은 분명 남자인 히로타란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몸은 여자로 바뀐 상황, 지갑을 열어보니 자신을 증명할만한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히로타는 금방 부딪쳤던 사람과 메모리가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이대로라면 여자인 몸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히로타는 바뀐 사람의 집을 찾아가게 되는데...

형편은 좋지 않지만 머리는 좋은 편이라 의대에 다니고 있는 '토시야'는 어느 날 중학교 때 동창이지만 별로 친하지 않았던 녀석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는다. 토시야는 동창과의 만남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병원장인 그의 아버지는 큰돈을 제안하며 몇 번이나 의대 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자기 아들의 시험을 대신 봐달라고 부탁한다. 몸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메모리만 바꿔 끼면 되므로 시험 볼 때 불이익을 받을 염려는 없지만 그럼에도 토시야는 찝찝한 기분을 털어낼 수 없다. 하지만 시험 보는 시간만 메모리를 바꿔끼면 평생을 모아야 만질 수 있는 거액 앞에서 토시야는 흔들리게 되고 그렇게 동창생과 자신의 메모리를 바꿔 끼게 된다.

이렇듯 <분리된 기억의 세계>는 대망각으로 인해 장기간 기억으로의 전환이 불가능해진 인간에게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몸은 나이지만 외부 메모리가 없으면 다 큰 성인도 그저 갓난아이에 불과한 수준이므로 생각하면 할수록 엄청난 공포를 불러온다. 이로 인해 죽은 이의 메모리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 가족이 죽은 이를 그리워하여 무당을 통해 현재로 불러내는 모습이나 대망각 시대를 피해 산속에 숨어든 사람들의 기억을 조정해 몸을 바꾸는 시청 공무원의 행동 속에 기억과 신체의 분리를 예측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들은 기존에 만났던 SF 속 이야기들과 맥락은 다르지 않지만 그보다 훨씬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나의 기억은 데이터로 남겨지고 고장이 잦아진 신체는 더 새로운 기능의 신체로 대체되는 SF 단골 이야기는 인간의 고독과 씁쓸함이 느껴지지만 이 책은 인간의 기억 소실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 현실감 있게 다가와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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