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나 융, 아들러 심리학은 손쉽게 접할 수 있어 낯설지 않은데 반해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로고 테라피'라는 용어 자체는 심리서에서 본 기억이 있어 낯익다 싶었는데 그 시초가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이었다니, 내가 숨 쉬는 이유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었던 갈망은 이 책을 통해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인간다운 깨달음을 주고 있다.
의미 치료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로 잡혀가기 전 미국행 비자를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자기가 떠나면 남겨질 노부모를 생각해 미국행을 포기한다. 결국 그런 그의 결단은 노부모와 신혼생활 중인 아내와 함께 수용소로 끌려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만든 뼈아픈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매일매일 이어지는 죽음의 갈림길에 선 그에게 숨 쉬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굴욕일 수 있는 상황에서 빅터 프랭클은 오직 가족을 생각해 살아남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는 살아서 아내를 다시 만나야겠다는 위대한 힘을 발휘해 수많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는다.
죽음의 갈림길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수용소의 사람들, 열악한 수용소의 생활 속에서 발진티푸스라는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과 실험실로 향하는 사람들 속에 죽어가는 타인에게 빵조각을 나눠주는 인간애는 도대체 어디에서 발현되는 것일까 싶은 의문도 문득 생긴다. 단순히 타인에게 베푸는 이타심으로 인해 나 자신이 더 큰 행복을 누린다는 말로 치부해버리기엔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애 앞에서 빅터 프랭클은 의미 치료를 실천하고 이론을 정리하며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모습에 다가선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으로 험난한 현재의 생활 속에서 평범하게 누렸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들이었는지 사람들은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오로지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위해 평범한 일상 속에 매일 되풀이되던 모든 것들에 감사함을 느낀다.
나를 포함하여 더 어린 세대들은 아마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하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초반 부분에서 이해할 수는 있겠으나 공감력은 떨어지고 그럼에도 뭔가 알 것 같지만 그것을 안다고 하기엔 너무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 그저 읽어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단지 언제 죽을지 모를 수용소의 생활을 담은 해묵은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이 더 낫다고도 할 수 없기에 글 속에 등장하는 해지는 풍경, 맑은 하늘,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 등을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들여다보게 된다.
물질적으로 너무 풍족하고 타인에 의해 내 생명이 좌지우지 당할 일이 없기에 우리는 외려 느끼고 타인에게 배려하는 것에 인색해졌고 감사한 마음을 멀리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이란 극한의 공포에 몰림으로써 가장 평범하고 기본적인 것들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것에 반해 풍족함에 길들여져 감사할 줄 모르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가장 따뜻한 인간애를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 하나로 살아남았던 빅터 프랭클의 로고 테라피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