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의 나이에 지갑엔 전 재산 9만 8천 원이 전부인 남자는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있다. 고향을 떠나 이렇게 산지 삼 년, 하지만 남자에겐 후회는 없다. 바라던 바였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에 막막함이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9만 8천 원으로 며칠을 버텨내지 못할 거란 너무도 당연한 현실 앞에 남자가 찾은 일은 택배기사였고 10개월 남짓 일한 게 전부인 택배 경험을 바탕으로 행운동을 배당받아 택배 일을 시작하게 된다.
아침 일찍 물건을 싣고 점심 전에 출발하여 7~8시간 동안 택배를 날라야 하는 직업, 물건을 싣고 배송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12시간 남짓을 오로지 일에 매달려야 하는 극한 직업에 몸은 처절한 아우성을 외치지만 남자는 조금 빠른 보폭으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게 요령이란 걸 나름 터득하여 매일 똑같은 일상을 묵묵히 헤쳐나간다.
그리고 남자는 할당된 택배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만큼의 다양한 일들을 겪게 된다.
그 속에는 남자가 죽은 남편을 닮았다며 의미 없는 말을 남발하는 여자와 남자에게 경제학을 알려주겠다며 집으로 공부하러 오라는 아흔에 가까운 경제학자, 게이임을 알고 집에서 개 패듯 맞고 쫓겨나 바를 하는 게이들, 5층까지 쌀 30포대를 배달시키는 노파, 덩치는 산만하지만 입을 열면 손을 씻어야 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늘어놓는 지체아, 비 오는 날 상자가 찢어졌다며 쌍욕을 하는 옷 가게 주인, 무거운 물건을 집안까지 날라달라며 당연한 듯이 하대하는 임신부, 떨어뜨린 물건을 패대기친다며 기분 나쁘게 반말을 지껄이던 대기업 간부 그리고 보험 일을 했거나 여러 가지 일을 하다 택배기사를 하게 된 동료들.
택배 기사들이 제대 식사할 시간도 없어 끼니도 거른 채 쫓기듯 택배 배송을 한다는 것을 나는 뉴스를 보고 알았다. 이동하는 중간중간 빵이나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운다는 것을 보고 진짜 극한의 직업이란 생각과 함께 먹고살기 위한 가장들의 노동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던 것 같다. 그전까지 택배 기사라고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거나 동정의 눈빛으로 보진 않았지만 잠깐 물건만 주고 가는 택배 기사들의 삶까지 딱히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으므로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었는데 이후 바뀐 택배 기사님이 힘든 기색 없이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일하시는 것을 보면서 어떤 스타강사의 명강의나 에세이보다 눈앞에서 목격한 그들의 진한 삶에서 자극을 더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누군가는 힘들면 시장에 간다고 하는데 나는 힘들 때마다 항상 웃으면서 일하시는 택배 기사님을 떠올린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택배 기사님이 더 많이 떠올랐는데 택배기사를 통해 본 다양한 인간상은 인생을 축약해 담은 것처럼 다가왔는데 그렇다고 힘들고 우울한 내용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 주인공의 뼈 대리는 대사들은 어찌나 웃긴지 정말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어젖혔던 것 같다. 평소 지인들이 나의 웃음 코드가 일반인들과는 다른 포커스가 맞춰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정말 오랜만에 나와 포커스가 맞는 웃음 포인트를 가진 주인공을 만난듯해 더욱 반갑게 다가와졌던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