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은 예언자 마르크스가 재림한 한 해였다. 이해는 새해 벽두 원산총파업으로 시작됐다. 드디어 조선의 프롤레타리아들이 계급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10월 말의 뉴욕 증시 대폭락은 사상 최고의 번영 시대를 구가하던 미국과 유럽 자본주의 제국들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조선은 연이어 풍년이라는데 쌀값이 폭락해 농민들은 땅을 잃고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고 2천만도 안 되는 인구에서 수백만이 굶주렸다. 모든 것이 마르크스가 예언한바,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입증하고 있었다.

 윤봉길은 그해 12월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어마어마한 고문을 당한 그는 다리를 못쓰게 되었고 앉은세로 처형대에 묶였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 제국주의를 겨냥한 테러는 꾸준히 있었지만 윤봉길처럼 후련하게 성공하기는 처음이다. 전승 축하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상해 파견군 총사령관을 절명시켜버렸다. 조선이나 일본에 테러리스트들이 잠입해 벌이는 거사들은 안타깝게도 성공하는 예가 거의 없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탓에 총알이 빗나갔고 사제폭탄은 중국서 들어오는 여객선화물칸에서 습기를 먹어 불발탄이 되었다.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압도적이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테러의 대상과 완성도, 그의 타깃인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유신과 조선강점과 아시아제국의 전략을 설계한 자였다. 안중근은 권총 탄창에 들어 있던 총알 일곱 개 가운데 세 발을 이토의 가슴과배에 명중시키고 만약 그가 이토가 아니었을 가능성에 대비해 옆의 네 사람에게 각각 한 발씩 쏘았다. 환영 인파가 북적이는 하빈 역 플랫폼에서 안중근은 마치 호젓한 숲속에서 사냥감을 조준!
하듯 그렇게 표적을 저격했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직업을 되수‘라고 대답했거니와 테러리스트로서 그는 진정한 프로페셔널이 었다. 안중근은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을 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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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라 그의 통치 - 포천 중리에서 만나는 다니엘
송영윤 지음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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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봄을 빼앗긴 2020 3월에 다니엘을 만났다.
가슴이 뜨겁다. 먹먹하기도 하다!
말씀이 참 신선하다. 불교, 천주교, 기독교계의 다양한 인물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교회와 목회자를 행한 애정 가득한 비판이 아프면서 달다. 구원에만 얽메여 있는 이기적인 신앙인을 향한 꾸짖음도 준엄하다. (그것이 나의 약한 실재적 모습이어서 더욱 되새기며 읽었다!) 성경적 상상력과 해석이 다니엘서를 입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줘서 영적인 큰 유익이 있었다.
처음에는 나의 딸, 나의 아들, 다음 세대가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주님의 통치가운데 살기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차츰 노구에도 불구하고 절식하며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다니엘의 모습이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다니엘의 하나님이 성경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와
내게 말을 거신다.
˝너는 지금 신앙인으로 사는가? 네 이웃을 위해, 네 후손을 위해 이렇게 간절히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신앙은 현재를 믿음으로 사는 것인데, 믿음으로 지금 네가 기록해 가는 사도행전, 다니엘서가 있는가? ˝

다니엘서가 400년 후 주전 2세기 박해당하는 성도들에게 새롭게 해석되며 힘과 위로를 주셨듯이 말씀을 믿음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것을 촉구해 준다! 주뱐을 돌아보게 한다. 이 나라와 이 민족에게, 내 삶의 주변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흘러가기를 바라고 원하고 소망한다!

박해받는 후손을 바라보며 기절할 정도로 괴로워하며 기도하는 다니엘의 마음이 이 시대 고통가운데 있는 세상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기를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게 된다.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성도들을 통해 세상으로 뻗어가기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나누고 보듬는 삶을 교회와 성도들은 살아야 한다. 다니엘의 믿음이 세상을 향해 흘러갔듯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섭리!
자신을 깨며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겸손함!
그의 나라, 그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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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 저는 믿음으로 살다가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싶었습니다. 다니엘서 11장은, 거의 신문 기사를 쓰듯이 ‘역사‘를 기록하면서, 그 일들을 마치 예언‘ 하고 있는 것처럼 썼지요. 사후예언! 하지만 마지막 뒷부분은 그야말로 ‘예언‘을 했는데(물론 때려 맞추기 식으로 아무렇게나 한 예언이 아니고, 당시 정세에 관한 수준 높은 정보와 판단에 근거한 예언임), 실제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렇게 틀린 점이 있는 예언의 말씀을 성경이 되게 하셨고, 2천년이 넘도록 수많은 신앙인들에게 다니엘서는 어떠한 박해에도 굽히지 않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실수할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남들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진실한 믿음으로 살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신다고요?
"괜찮다! 내가 그 모든 것을 다 어루만져 줄 것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을 것이다! 상처를 감싸 주고, 아픔을씻어 주리라. 온전히 회복시켜 주리라!"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도 별 어려움이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어려운 일에 나서야 합니다. 신앙의 가치를 실현시키는 일, 그런데 남들은 잘 나서지 않는 일, 왜 꼭 내 눈에만 자주 어른거리는지 모르겠는 바로 그 일, 그 일을 하자면 내 삶이 조금은 고달파지는 일,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그 일을 위해 나서야 합니다. 그 일을 하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과 평안을 주신 것입니다. 시간과 건강, 재물을 주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그런 삶을 추구하는 자세가 진짜 믿음입니다!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의인이 세속권력의 악인에게 죽는 것으로 그 생명이 끝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정의 실현이 부활이고 영생입니다. 다시 살고(부활), 오래 살 것(영생)을 무작정 바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 이순간을 뜻있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활과 영생으로 응답하시지않으면 안 될, 그런 믿음으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더 나빠진 세상 속에서 박살이 나더라도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깨질 때 깨지더라도, 아니 다 깨질 때까지라도 성도로서의 신념과 패기를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해서 땅의 티끌 속으로 잠들게 된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를 다시 깨어나게 하셔서 영생을 얻게 하실 것이다!!
역사의 현실이 살아 숨 쉬는 방식으로 이렇게 다니엘서 속으로 스며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를 당하던 성도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주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성경은 성도들의 믿음에 영향을 주기만 하는데에서 그치지 않고, 성도들의 믿음에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던 성도들의 깊은 고민을 받아들여서 다니엘서를 한결더 강하고 굳세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서는 그 시대의 고민과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담게 된 것입니다. 아! 성경이 이렇게 박해받던 시대를 살던 성도들의 거친 숨결을 담아낼 수 있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도의 권세에서 ‘권세‘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의 본뜻은 ‘손 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손이 다 깨지기까지"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손일까요? 인간으로서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때까지! 사람이 쓸 수 있는 수단이 없을 때 그래서 두 손들고 하늘의 뜻에 온전히 맡길 수밖에 없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뜻이 아닐까요? 7절에서 세마포를 입은 자가 두 손을 들고맹세를 한 것도 이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핍박받던 성도들은, 완전히 무너져서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때까지 가야한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내려놔라! 너는 혹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성도로서의 삶을 끝까지 지켜라!

그때 성도들은, ‘어? 이게 뭐야? 성경 이거 다 틀린 거네. 집어치워야겠다!‘ 이러지 않고, 믿음의 태도를 유치한 채, 계속 자세하게 역사를 살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려 140일 동안이나! 그러다가 드디어 기대하던 사건이 터지자 그에 맞게 예언을 수정하기도 하고 보완하기도 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과정을 성경이 되게 하셨어요! 2주 전에 말씀드린 내용이지요?
믿음으로 살다가 틀릴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그렇게 틀린 것은 내가 다 회복시켜 줄 것이다!
그 140일 기간 동안 세상은 이런 모습으로 갈렸습니다. 의인과 악인으로!

성도의권세가 다 깨지기까지! 그때까지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어려움이나 세상의 환난을 겪을 때 요행이나 운수를 바라지 말고, 그것들이 주는 아픔과 충격을 성도답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너, 다니엘, 너는 끝까지 신실하여라. 너는 죽겠지만, 끝날에는 네가 일어나서, 네게 돌아올 보상을 받을 것이다!(단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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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의 기록에는 험악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가 간 신앙인들의 투지가 서려있다.

 태양은 이미 저 하늘에 있지만, 우리가 태양의 존재(빛)를 인식하는 데엔 8분이 걸린다면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에 이루어지는 데에 시간차가 있다고 그랬대요. 그걸 인내해야 하는 것이신앙의 삶이라고, 오오~ 제가 지금 들어도 꽤 괜찮아요.

"너희들은 뭘 덧붙이고 꾸며야 멋있어지는 줄 알지만, 사실은 반대다. 너희는 이미 충분히 멋있다. 덧붙일 게 아니라 빼야 한다. 옥처럼 이미 충분히 예쁘기 때문에 티만 빼면 된다. 아름다운 옥에다 뭘 덧붙이면 그건 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거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내안에서 빼내야 할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라.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정금으로 제련하신다.…."

휘몰아치는 세계사의 격변기에서 비록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아무런 일도 한 게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믿음만은 붙들고 있었다는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좌절하거나 실의에 빠져 역사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손기정, 남승룡, 안봉근처럼! 저는 우리 신앙에서 이런 면이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작아도 건강한 씨앗은 두꺼운 수풀이 그 위에 덮였어도 마침내 커다란 아름느리로 자라나는 것처럼, 순도 높은 믿음은 무거운 환경이 그 위를 덮쳐도 기어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구어냅니다. 인간의 권세, 그 너머에 하나님이 ㅛㅏㄹ아 계십니다.

악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을 살았지만,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예언의 말씀 속에 자기 시대의 현실을 과감히 옮겨 넣었어요. 감정이입이 아니라, 현실이입을 한 겁니다! 우리도 성경 읽을 때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 이건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야!‘ 그러면서성경의 내용에 따라 우리 삶을 해석하기도 하고, 우리 삶의 특정한 어떤 부분을 성경에 집어넣어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것도 성경이 된다는 겁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바른 해석과 진실한 마음이어야 해요. 그게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사도행전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김세윤 교수님의 인터뷰 기사 2011년에 실린 기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시간상 미래로 연기하거나, 공간상 하늘 위로 밀어 올려선 안 된다. 지금 여기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이런 말을 하면서 나 스스로를 향해 설교하는 것이다. 가치 판단의순간 열 번 중 한 번이라도, 나의 욕심보다는 예수님의 권면에 따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기준으로 해 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중요 하다.

주전 6세기의 다니엘이 받은 최초의 예언이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예언! 그것이 주전 2세기에 핍박당하던 경건한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상당한 교감과 상호작용이 반영되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하나님은 그런 과정에 성령의 감동을 덧입혀서 성경이 되게 하셨다."
 성경은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신앙의 상상력으로!
 역사도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신앙의 상상력으로! 주전 2세기 박해 당하던 유대인들은 주전 6세기의 다니엘이 남겨준 환상과 묵시를 그렇게 읽은 겁니다.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소중히 여 기는 ‘영화로운 땅‘이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걸 되찾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항해서 높아진 마음을 낮추고, 자기의 고집을 주장하는 태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영화로운 땅‘에 다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저도 설립기념주일을 맞아서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많습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한 분들을 생각하면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감사하다는 말을 제가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제가 감사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였을 뿐인데, 제가 주제넘게 끼어들어 왈가왈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분들의 사랑을, 마치 저를 향한 사랑인 것처럼 왜곡하여 훼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 중하나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봉원교회 박용권 목사

제가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점은 이것입니다. 틀린 점이 없지 않은 예언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성경이 되게 하셨어요! 이 문장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게는 아주 의미 있게 다가온 내용입니다. 다니엘서는 2천년이 넘도록 수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도록 영감어린 이 책에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내다보았지만 정확하게 맞히지는 못한 이들의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믿음의 기백과 정신이지 사소한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고, 그와 같은 실수나 작은 잘못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안에서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으로저는 이해하고 싶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이 정확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거기에 맞춰서 계산하며 행동하는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이익과 손해를 따져가며 확실한 결과가 보장될 때에만 나서는 태도는 믿음이 아니에요. 때로는 실수도 하고 그래서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성령의 감동을 따라 과감하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저 사람을도와줄까 말까, 내 것을 더 나눌까 말까, 좀 더 자존심을 부릴까 아니면확 사랑해야 할까,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러다 인생 다 가요. 언제 믿음으로 살고, 언제 사랑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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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세계 안에서 국가는 그 백성들에겐 감히 하나님과 맞먹을 수 있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고, 국가의 통치는 하나님의 뜻 아래서 상대화되어야 합니다. 국가가 최고가 아니에요. 
국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에 이바지할 때에야 비로소 국가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의미를 갖습니다. 

 1. 성경은 나라를 짐승에 비유했다. 그만큼 위험하다!!
 2. 그중 제일 마지막에 나온 ‘작은 뿔이 아주 고약하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백성을 박해한다.

교회는 바른 신앙으로, 나라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가도록 일해야 합니다. 혹시 국가가 잘못된 길을 가면 고회가 바로잡아야 합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독일을 주무르고 있을 때 독일교회는 이걸 똑바로 못했어요.

국가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모든 권력은 비판과 경계의 대상입니다. 국가는 하늘 위에 있지 않고, 하늘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대상입니다.  국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국가로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권세와 영광과 나라! 이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 2천년이 넘도록 교회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때를 견뎌야 한다. 낙심하고 좌절하기에 충분할 만한 상황이고, 환란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지만, 그래도 견뎌야 한다! 이건 끝이있는 싸움이다! 다니엘이 오래 전부터 기도했던 그 시대의 주역이 바로 우리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나? 하나님이 옳다면 옳고,
그르다면 그르다고 받아들일 마음! 내가 옳다고 생각하던 것을 하나님이그르다고 하시면, "아멘!" 하겠는가? 듣기 싫은 말이라도 거부할 수 없는진리라면 "아멘!" 하고, 잘못 생각했던 것이라면 바로잡겠다는 마음으로
"아멘!" 하며 기꺼이 스스로 달라지겠는가?

다니엘서 처음부터 2장 3절까지는 히브리어로, 2장 4절부터 7장 28절까지는 아람어로 그리고 8장 1절부터 마지막까지는 다시 히브리어로 쓰여 있습니다. 아람어는 그 당시 중동지역에서 널리 쓰던 말입니다. 히브리어는 이스라엘 말이지요.

 "이스라엘 민족 똑똑히 들어라! 그런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까 비유를 다시하자면, 일제가 세력을 떨치던 때에 일본어로 써서 일본, 조선, 중국,
러시아까지 신앙투쟁기가 널리 퍼지게 한 것이고, 이제 다시 우리말로돌아와 조선인에게 주목하라고 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세계에서도 일하고 있으니, 이젠 유대인이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믿음은 그렇게 세상도 알고 나도 알아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을 알아야 내가 누군지도 알 수 있습니다. 

 1 믿음은 시대를 읽는다! 다니엘은 벨사살 왕 이후 시대를 보았기 때문에, 그의 위엄에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었다.
2. 하나님은 교회뿐 아니라 교회 밖 세상도 다스리신다. 아람어(2 -7장)와 히브리어(8장 이후). 그러니 믿음은 ‘세상‘도 알고 나도 알아야 한다.
3. 하나님 백성의 배교와 불순종 때문에 이방 나라의 권력자가 큰소리치는 세상이 되었다. 성소를 짓밟고 하나님 백성을 박해하면서도형통했다. 친일파와 비슷하다!

신앙은 현실과 마주하는 능력
환상이 비로소 역사의 현실 속에서 의미가 되는 순간
성전이 정의롭지 못해서 불의한 권력이 날뛰었다.

자기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 같을 때, 삼갈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공동체와 세상을 위해 자기를 낮추는 마음가짐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통해 전해질 때, 가장 파괴력이 큽니다. 종으로 섬기는 사람을 통할 때, 복음은 위력을 떨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커지려면,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입니다. 전하는 그사람을 먼저 낮추지 않고 전해지는 복음은 세상에 복된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시끄러운 소음이나 종교라는 이름의 폭력이 되거나 또는 "너나 잘하세요."같은 조롱과 야유를 받기 쉽다.

1930년대 장로교회는 하나님인 체하는 국가(일제)와 싸워야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장로교회는 국가를 멀리하고 대항하기보다는, 이와는 반대로 국가와 대화하고 국가에 의존하였다. 이것이 1930년대 장로교회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장로교회가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조직을 견고하게 하였지만, 그것은 결국 국가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말았다(436쪽)…. 장로교회의 책임은….. 성장과정 에서 비신앙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다…. 개교회주의, 성장지상주의, 물질주의 등 부정적인 현상들이 이미 1930년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장로교회 조직이 권력기관이 됨으로써 권력을 둘러싼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1938년 신사참배 결의 이후에도 교회가 여러 부문에서 계속 성장하였다는 점이 이것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교회의 본질이 크게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가 1941년) 까지는 계속 성장하였다는 사실은 그 교회가 어떤 교회였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일제의 강요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아니고, 장로교회 자신의 책임이다(박용권 목사님443쪽).

바울이나 루터는 처음부터 죄를 행한 자들에게만 주목하고 있다는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행한 악한 행위 때문에 피해자들이 겪는 고난과 모욕, 아픔과 상처를 주시하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바울과 루터가 내 안에 거하는 죄‘와 그 죄의 노예인 ‘나‘에 관해 말하는 데비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백성 가운데 소외된 자들에게 있다는 겁니다. 죄악의 피해자들이지요. 그러면서 몰트만은 이렇게 말해요.
예수의 시선은 ‘죄의 노예들 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희생자들을 향하고 있다. 예수는 그들에게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져다주신다. 그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들의 것이다.

종교는 세상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 관계를 소금과 빛에 비유했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것이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전체의 종교다. 종교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라 그 전체(세상)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라 그 전체(세상)다.-함석헌(1956)

그 안에 들어서면 겸손한 마음으로 뉘우치며 스스로를 낮추지 않을 수없는 교회, 사사로운 인간의 생각들이 성경의 권위 아래 잦아드는 교회,
주여! 라는 한 마디 기도에도 강력한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교회!

C. S. 루이스는 『시편사색』이라는 책에서, 온갖 악인들 중 가장 악한 사람은 종교의 악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를 더나은 사람으로 달라지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훨씬나쁘게 만든다고도 했어요. 교회 다니는 나쁜 사람!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오늘 하루 교회에서 지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태도를 갖는지, 얼마나 더 좋은 사람이 되는지 깊이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 정말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지? 하지만 지금 이 몹쓸 세상은 우리 조상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야. 성소가 봉헌되고 대제사장이 세워졌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우리 민족이 새로워지진 않을 거라고 했어. 다니엘은 그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고 하지도 않았어. 아직도 깨닫지못하고 여전히 타락한 채 남아 있는 백성의 허물과 죄! 이것이 먼저해결되어야 한다고 했지.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깨우치시려고 저 악한 이방 나라의 왕을들어서 예루살렘과 성소를 무너뜨리신 거야. 아프고 괴로운 역사지만 참고 견뎌야 해! 이것은 우리를 선한 백성 삼으시려고 하나님이 작정하신 역사야! 그 쓰라림을 톡톡히 맛보고, 선으로 악과 맞서 싸우며,
거룩하고 정결한 하나님 백성으로 거듭나도록 하나님이 작정하신 역사!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우리는 그 마지막 한 이레를 살고 있는 거야. 그러니 거룩한 성소가 온전히 회복될 그 날을 꿈꾸며 우리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고, 눈앞에 있는 세상의 악과 싸워야 해!!

교회 오적: 교회가 교회다움을 상실한 시대, 그 원인을 짚는다(주원규목사)
1. 규모의 괴물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보이는 독재의식과 그걸 뒷받침하는 거대한 교회의 시스템. 사람 수의 크기에 따른 교회의 계급화, 서열화
 2. 표절의 왕국
한국 개신교만큼 분명한 경전을 확보한 종교는 없지만 설교는 대동소이
교인 수늘리려는 프로그램들이 아우성
3.해석의 부재. 
교회가 처한 시대와 사회에 대해 성경의 정신을 적용시키는해석이 없다. 성경의 가치를 따라 역사를 해석하고 역사가 나가야할 방향을 외치는, 성경을 해석하는 공동체다운 교회가 드물다. 성서정신의 본질은 생각조차 못하는 무뇌아들과 무조건 믿기만 하라.
는 반복훈련.
4. 선민의식의 창궐 
이미 무지와 오만의 집약세가 되었음에도 단 하나 포기할 수 없는 무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헛된 자부심! 유대인들이 그토록 구하다가 결국 그것 때문에 망한 거짓 위로, 선민의식 -국의 괴물이 포악한 굿판을 벌이고 양심 마비의 설교표절이 예의 일상으로 자리 잡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기만 하라고 말하며, 바른 해석을 추구하는 공동체이기를 스스로 포기해도, 그래도 교화는 최소한 구원은 보장받는다는 근거 없는 선민의식으로 유지된다.
5. 그러므로 상실의 시대.
교회가 교회로서 최소한의 역할조차 감당하시 못하고, 무엇을 어게 돌이켜야 할지 각도조차 설정하지 못한채 표류하는 비극을 슬퍼하지 않늠 현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진실하고 놀랍지만, 그 뜻을 깨닫는 과정은 만만치 않습니다! 때로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과 마주하기도 해야 하고, 자기를 깨뜨려야 하기도 합니다.

다니엘은 깨닫기 위해 스스로를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겸비하다‘는 히브리말의 뜻은 ‘괴롭힌다. 고통을 가한다 입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겸비하게 해야 한다고 다니엘은 생각했습니다. 겸손, 자기를 낮추는 거지요. 깨달으려면 깨져야 해요. 고통을 겪
‘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니엘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자신이 품었던 희망과 기대가 깨져야 하니까요.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자기의 기대.
 희망,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수 있습니다.

깨닫고 일어서야 합니다. 깨닫지도 못하고 일어서면 위험해요. 깨닫는 힘이 있어야 일어설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깨달음은 자기를 극복하는 것을말합니다. 거기엔 우리 스스로 해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평화는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세상을 두려없이 받아들일 때라고 옵니다. 그것이 비록 자기가 기대하던 것과 다르더라도! 천사를 통해 보여 준 환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니엘은 자기 자신을 깨뜨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창조하는 평화를 일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어렵더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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