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세계 안에서 국가는 그 백성들에겐 감히 하나님과 맞먹을 수 있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고, 국가의 통치는 하나님의 뜻 아래서 상대화되어야 합니다. 국가가 최고가 아니에요. 국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에 이바지할 때에야 비로소 국가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의미를 갖습니다.
1. 성경은 나라를 짐승에 비유했다. 그만큼 위험하다!! 2. 그중 제일 마지막에 나온 ‘작은 뿔이 아주 고약하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백성을 박해한다.
교회는 바른 신앙으로, 나라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가도록 일해야 합니다. 혹시 국가가 잘못된 길을 가면 고회가 바로잡아야 합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독일을 주무르고 있을 때 독일교회는 이걸 똑바로 못했어요.
국가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모든 권력은 비판과 경계의 대상입니다. 국가는 하늘 위에 있지 않고, 하늘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대상입니다. 국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국가로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권세와 영광과 나라! 이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 2천년이 넘도록 교회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때를 견뎌야 한다. 낙심하고 좌절하기에 충분할 만한 상황이고, 환란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지만, 그래도 견뎌야 한다! 이건 끝이있는 싸움이다! 다니엘이 오래 전부터 기도했던 그 시대의 주역이 바로 우리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나? 하나님이 옳다면 옳고, 그르다면 그르다고 받아들일 마음! 내가 옳다고 생각하던 것을 하나님이그르다고 하시면, "아멘!" 하겠는가? 듣기 싫은 말이라도 거부할 수 없는진리라면 "아멘!" 하고, 잘못 생각했던 것이라면 바로잡겠다는 마음으로 "아멘!" 하며 기꺼이 스스로 달라지겠는가?
다니엘서 처음부터 2장 3절까지는 히브리어로, 2장 4절부터 7장 28절까지는 아람어로 그리고 8장 1절부터 마지막까지는 다시 히브리어로 쓰여 있습니다. 아람어는 그 당시 중동지역에서 널리 쓰던 말입니다. 히브리어는 이스라엘 말이지요.
"이스라엘 민족 똑똑히 들어라! 그런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까 비유를 다시하자면, 일제가 세력을 떨치던 때에 일본어로 써서 일본, 조선, 중국, 러시아까지 신앙투쟁기가 널리 퍼지게 한 것이고, 이제 다시 우리말로돌아와 조선인에게 주목하라고 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세계에서도 일하고 있으니, 이젠 유대인이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믿음은 그렇게 세상도 알고 나도 알아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을 알아야 내가 누군지도 알 수 있습니다.
1 믿음은 시대를 읽는다! 다니엘은 벨사살 왕 이후 시대를 보았기 때문에, 그의 위엄에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었다. 2. 하나님은 교회뿐 아니라 교회 밖 세상도 다스리신다. 아람어(2 -7장)와 히브리어(8장 이후). 그러니 믿음은 ‘세상‘도 알고 나도 알아야 한다. 3. 하나님 백성의 배교와 불순종 때문에 이방 나라의 권력자가 큰소리치는 세상이 되었다. 성소를 짓밟고 하나님 백성을 박해하면서도형통했다. 친일파와 비슷하다!
신앙은 현실과 마주하는 능력 환상이 비로소 역사의 현실 속에서 의미가 되는 순간 성전이 정의롭지 못해서 불의한 권력이 날뛰었다.
자기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 같을 때, 삼갈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공동체와 세상을 위해 자기를 낮추는 마음가짐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통해 전해질 때, 가장 파괴력이 큽니다. 종으로 섬기는 사람을 통할 때, 복음은 위력을 떨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커지려면,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입니다. 전하는 그사람을 먼저 낮추지 않고 전해지는 복음은 세상에 복된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시끄러운 소음이나 종교라는 이름의 폭력이 되거나 또는 "너나 잘하세요."같은 조롱과 야유를 받기 쉽다.
1930년대 장로교회는 하나님인 체하는 국가(일제)와 싸워야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장로교회는 국가를 멀리하고 대항하기보다는, 이와는 반대로 국가와 대화하고 국가에 의존하였다. 이것이 1930년대 장로교회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장로교회가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조직을 견고하게 하였지만, 그것은 결국 국가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말았다(436쪽)…. 장로교회의 책임은….. 성장과정 에서 비신앙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다…. 개교회주의, 성장지상주의, 물질주의 등 부정적인 현상들이 이미 1930년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장로교회 조직이 권력기관이 됨으로써 권력을 둘러싼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1938년 신사참배 결의 이후에도 교회가 여러 부문에서 계속 성장하였다는 점이 이것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교회의 본질이 크게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가 1941년) 까지는 계속 성장하였다는 사실은 그 교회가 어떤 교회였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일제의 강요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아니고, 장로교회 자신의 책임이다(박용권 목사님443쪽).
바울이나 루터는 처음부터 죄를 행한 자들에게만 주목하고 있다는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행한 악한 행위 때문에 피해자들이 겪는 고난과 모욕, 아픔과 상처를 주시하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바울과 루터가 내 안에 거하는 죄‘와 그 죄의 노예인 ‘나‘에 관해 말하는 데비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백성 가운데 소외된 자들에게 있다는 겁니다. 죄악의 피해자들이지요. 그러면서 몰트만은 이렇게 말해요. 예수의 시선은 ‘죄의 노예들 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희생자들을 향하고 있다. 예수는 그들에게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져다주신다. 그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들의 것이다.
종교는 세상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 관계를 소금과 빛에 비유했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것이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전체의 종교다. 종교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라 그 전체(세상)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라 그 전체(세상)다.-함석헌(1956)
그 안에 들어서면 겸손한 마음으로 뉘우치며 스스로를 낮추지 않을 수없는 교회, 사사로운 인간의 생각들이 성경의 권위 아래 잦아드는 교회, 주여! 라는 한 마디 기도에도 강력한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교회!
C. S. 루이스는 『시편사색』이라는 책에서, 온갖 악인들 중 가장 악한 사람은 종교의 악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를 더나은 사람으로 달라지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훨씬나쁘게 만든다고도 했어요. 교회 다니는 나쁜 사람!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오늘 하루 교회에서 지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태도를 갖는지, 얼마나 더 좋은 사람이 되는지 깊이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 정말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지? 하지만 지금 이 몹쓸 세상은 우리 조상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야. 성소가 봉헌되고 대제사장이 세워졌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우리 민족이 새로워지진 않을 거라고 했어. 다니엘은 그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고 하지도 않았어. 아직도 깨닫지못하고 여전히 타락한 채 남아 있는 백성의 허물과 죄! 이것이 먼저해결되어야 한다고 했지.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깨우치시려고 저 악한 이방 나라의 왕을들어서 예루살렘과 성소를 무너뜨리신 거야. 아프고 괴로운 역사지만 참고 견뎌야 해! 이것은 우리를 선한 백성 삼으시려고 하나님이 작정하신 역사야! 그 쓰라림을 톡톡히 맛보고, 선으로 악과 맞서 싸우며, 거룩하고 정결한 하나님 백성으로 거듭나도록 하나님이 작정하신 역사!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우리는 그 마지막 한 이레를 살고 있는 거야. 그러니 거룩한 성소가 온전히 회복될 그 날을 꿈꾸며 우리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고, 눈앞에 있는 세상의 악과 싸워야 해!!
교회 오적: 교회가 교회다움을 상실한 시대, 그 원인을 짚는다(주원규목사) 1. 규모의 괴물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보이는 독재의식과 그걸 뒷받침하는 거대한 교회의 시스템. 사람 수의 크기에 따른 교회의 계급화, 서열화 2. 표절의 왕국 한국 개신교만큼 분명한 경전을 확보한 종교는 없지만 설교는 대동소이 교인 수늘리려는 프로그램들이 아우성 3.해석의 부재. 교회가 처한 시대와 사회에 대해 성경의 정신을 적용시키는해석이 없다. 성경의 가치를 따라 역사를 해석하고 역사가 나가야할 방향을 외치는, 성경을 해석하는 공동체다운 교회가 드물다. 성서정신의 본질은 생각조차 못하는 무뇌아들과 무조건 믿기만 하라. 는 반복훈련. 4. 선민의식의 창궐 이미 무지와 오만의 집약세가 되었음에도 단 하나 포기할 수 없는 무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헛된 자부심! 유대인들이 그토록 구하다가 결국 그것 때문에 망한 거짓 위로, 선민의식 -국의 괴물이 포악한 굿판을 벌이고 양심 마비의 설교표절이 예의 일상으로 자리 잡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기만 하라고 말하며, 바른 해석을 추구하는 공동체이기를 스스로 포기해도, 그래도 교화는 최소한 구원은 보장받는다는 근거 없는 선민의식으로 유지된다. 5. 그러므로 상실의 시대. 교회가 교회로서 최소한의 역할조차 감당하시 못하고, 무엇을 어게 돌이켜야 할지 각도조차 설정하지 못한채 표류하는 비극을 슬퍼하지 않늠 현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진실하고 놀랍지만, 그 뜻을 깨닫는 과정은 만만치 않습니다! 때로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과 마주하기도 해야 하고, 자기를 깨뜨려야 하기도 합니다.
다니엘은 깨닫기 위해 스스로를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겸비하다‘는 히브리말의 뜻은 ‘괴롭힌다. 고통을 가한다 입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겸비하게 해야 한다고 다니엘은 생각했습니다. 겸손, 자기를 낮추는 거지요. 깨달으려면 깨져야 해요. 고통을 겪 ‘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니엘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자신이 품었던 희망과 기대가 깨져야 하니까요.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자기의 기대. 희망,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수 있습니다.
깨닫고 일어서야 합니다. 깨닫지도 못하고 일어서면 위험해요. 깨닫는 힘이 있어야 일어설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깨달음은 자기를 극복하는 것을말합니다. 거기엔 우리 스스로 해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평화는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세상을 두려없이 받아들일 때라고 옵니다. 그것이 비록 자기가 기대하던 것과 다르더라도! 천사를 통해 보여 준 환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니엘은 자기 자신을 깨뜨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창조하는 평화를 일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어렵더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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