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은 예언자 마르크스가 재림한 한 해였다. 이해는 새해 벽두 원산총파업으로 시작됐다. 드디어 조선의 프롤레타리아들이 계급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10월 말의 뉴욕 증시 대폭락은 사상 최고의 번영 시대를 구가하던 미국과 유럽 자본주의 제국들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조선은 연이어 풍년이라는데 쌀값이 폭락해 농민들은 땅을 잃고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고 2천만도 안 되는 인구에서 수백만이 굶주렸다. 모든 것이 마르크스가 예언한바,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입증하고 있었다.
윤봉길은 그해 12월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어마어마한 고문을 당한 그는 다리를 못쓰게 되었고 앉은세로 처형대에 묶였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 제국주의를 겨냥한 테러는 꾸준히 있었지만 윤봉길처럼 후련하게 성공하기는 처음이다. 전승 축하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상해 파견군 총사령관을 절명시켜버렸다. 조선이나 일본에 테러리스트들이 잠입해 벌이는 거사들은 안타깝게도 성공하는 예가 거의 없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탓에 총알이 빗나갔고 사제폭탄은 중국서 들어오는 여객선화물칸에서 습기를 먹어 불발탄이 되었다.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압도적이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테러의 대상과 완성도, 그의 타깃인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유신과 조선강점과 아시아제국의 전략을 설계한 자였다. 안중근은 권총 탄창에 들어 있던 총알 일곱 개 가운데 세 발을 이토의 가슴과배에 명중시키고 만약 그가 이토가 아니었을 가능성에 대비해 옆의 네 사람에게 각각 한 발씩 쏘았다. 환영 인파가 북적이는 하빈 역 플랫폼에서 안중근은 마치 호젓한 숲속에서 사냥감을 조준!
하듯 그렇게 표적을 저격했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직업을 되수‘라고 대답했거니와 테러리스트로서 그는 진정한 프로페셔널이 었다. 안중근은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을 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