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 떨림, 그 두 번째 이야기
김훈.양귀자.박범신.이순원 외 지음, 클로이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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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랑 - 사랑을 생각하지 않고 결혼했다. 결혼하고 보니 사랑이더라.

우리 부모님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부부다. 어머니는 기가 세셔서 아버지에게 면박을 줄 때도 많지만 옷이며 음식이며 자식보다 남편을 먼저 챙긴다. 아버지는 잔소리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 싶고 다툴 때도 많지만 가족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신다. 그런데 TV에서 외국 배우들이 키스하는 장면이 나올 때 마다, 어머니는 더러워서 보기 싫다며 채널을 돌리신다. 그럼 대체 부모님은 어떻게 연애를 한걸까? 맞선을 봤다고는 하지만 1년 후에 결혼을 하셨다고 하던데.

사랑이 만화처럼, 운명처럼 다가올 것이라 아내는 기대하지만... 말없이 같이 있고 싶어하는 남편의 마음이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김나정 - 가장 미운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였어.

사사건건 눈에 꼭꼭 밟히고 꼬집어주고 싶을만큼 미운 짓만 골라하는 사람. 별건 아니다 싶어도 어느새 돌이켜보니 내게 가장 큰 사람.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대목이 나왔다. 타락하지 않은 삶은 사랑을 선택하는 삶인가. 

 

고은주 - 가족이란건.

피로 이어져야만 진정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차라리 입양이 낫다면서 전처의 아이들을 키우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들.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전처의 자식을 "참아내어" 키운다고 보는 시각들. 그렇지만 남자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남자를 닮은 그 자식들이 날로 더 사랑스러워지는 작가의 마음이 따뜻하다. 사랑하기에 그 사랑을 닮은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게 우리 삶의 가장 위대하면서도 소소한 진리다.

 

김규나 -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그저 감사할 수는 없다.

여자는 누구나 자기 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까. (아니, 남자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사랑을 베풀기에 나로 하여금 헐떡이게끔 하는 사랑 또한 무작정 행복하지만은 않겠구나 싶다. 그래도, 그래도 이런 사랑을 한 번쯤은 받아보고 싶다. 너무 사랑해서 티낼 수 없는 그런 사랑을.

 

김훈 - 사람의 몸은 서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완전히 닿을 수는 없는 법.

겨드랑이 밑으로 사라지는 정맥. 그 끝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고. 그저 여자의 몸 속으로 사라진다. 그처럼 사람이 완전히 하나가 될 수는 없다. ...다름을 시인하면서도 그게 너무 아픈 거다. 오히려, 그로 인한 결핍이 정말 사랑이다. 그런 닿을 수 없는 모든 것, 만질 수 없는 모든 것, 그 때문에 아픈 것. 그게 모두 사랑이다... 한구절 한구절이 모두 시적인 표현이다.

 

양귀자 -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내겐 이러한 사람이 없다. 누군가가 날 이토록 사랑할 거라고. 내가 누구와 함께 있든, 누구와 함께 살든, 개의치 않고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렇기에 그러한 사랑의 크기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현실에 착 달라붙어 있는 사람이라 그런 것일까. 그처럼 함께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 걸까? 그때문에 오만해져 오히려 행복을 놓치는 것은 슬프겠지만, 그래도 바란다.

 

한차현 - 육체와 정신의 사랑.

관계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날 때, "날 사랑해서 하는 거야, 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거야?"라고 여자들은 많이 의문을 가진다. 하지만 남자들은 정말 솔직히 말해, "잘 모르겠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솔직해서 더 이해가 간다. 몸속에서 사랑이 끓어 넘쳐서 가지고 싶었던 여자,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이 끝나버렸고 여자는 마지막으로 사랑을 끝내면서 남자에게 자신을 준다. 끝남의 의미. 남자는 여자의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사랑과 섹스, 그건 하나일까?

 

신이현 - 어차피 끝날 것을.

파리에서 만난 브라질의 남자. 서로 가난하기에 서로 끝밖에 보이지 않고, 그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저 같이 객기를 부릴 뿐인, 그런 사이임에도... 무언가를 준다고 더 가졌다고 더 사랑을 느낄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어서 내던져주는 사랑이 있었는데도 그것을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떠밀고 돌아선다. 어차피 마지막은 추억일 테고. 후회할 거라 알고 있었는데.

후회와 추억이 나을까, 후회와 안락함이 나을까.

 

서하진 - 내게도 로망이 있어.

로망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누군가가 날 간절히 사랑해서 추운 겨울에 3시간 동안 창밖에 기다리고 서 있다가 노래를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 같이 바다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보다가 그대로 죽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날 잊지 못해 결혼하고 나서도 날 찾아서 전화를 걸어 준다면... 그런다면...

우리는 하늘을 날지도, 마법을 쓰지도, 사자를 타고 달릴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로망일 것이다.

누군가가 날 너무나 사랑하는, 그런 상상.

 

 

 

읽고 좋았던 글 몇 개만 추슬러서 한 마디씩 적으려 했더니, 한 마디는 몇 마디가 되었고, 몇 개는 거의 전체가 되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떨리고 설렌다.

바싹 비틀어져서 벌써 그런 것이 무엇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언제 설레였더라?

혼자인 지금,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준다면! (설레도록!)

그랬으면 싶다는 생각이 치솟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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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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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모파상

자연주의 소설가 모파상. 플로베르의 제자인 모파상. 단편소설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모파상. 여자에게 주의를 기울인 모파상.

내가 기억하는 모파상은 그 정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나서 모파상의 단편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째서인지 나는 예전에 모파상을 굉장히 따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첫소설인 '비곗덩어리'가 실린 단편소설을 읽고서 충격을 받았다. 자연주의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도 느꼈다. 모파상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작가의 목소리로 등장인물이 어쩌느니 저쩌느니하고 판결을 내리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모습을 그대로 '묘사'할 뿐이다. 주인공이 착하지만 어리석다고 그 성격을 규정한다든가 영리하지만 사악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행동과 모습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모파상의 단편을 읽을 때면, 어쩔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모두 그들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 뿐이다. 자고나란 사회의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뿐이지, 딱히 선한 자가 따로 있고 악한 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평범하고 편협적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하나쯤은 세상을 규정짓고 판단하며 살아갈 기준점 정도는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에 얽매여서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것. 정말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

 

2.표지

이번에 민음사판으로 나온 '벨아미'는 사실 표지가 마음에 쏙 든다.

작가의 사진을 표지로 할 때도 있고, 작가가 남긴 그림으로 표지를 할 때도 있지만, 가장 많이 선택되는 것은 작품의 내용과 어울리는 미술작품이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모두가 손잡고 빙글빙글 도는 모습의 작품을, '나사의 회전'에서는 지식 여성의 이지적이면서도 어딘가 음울한 모습이 담겨 있었고, 이번 '벨아미'에서는 냉철해 보이나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한 남자의 초상이 선택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표지의 남자가 계속 머릿속에 떠오를 정도로 일치하는 이미지다.

제본에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좁고 길다는 것이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은 모두 같은 방식의 제본을 따랐는데, 읽을 때마다 한 페이지 분량이 적다는 생각이 항상 든다. '벨아미'도 굉장히 많아 보였는데 한 장에서 양옆,앞뒤를 모두 제하고 나니 금방 금방 페이지가 넘어가게 되었다.

 

3.조르주 뒤루아. 조르주 뒤루아 드 캉텔. 뒤루아 드 캉텔 남작.

아프리카를 헤매던 하사관에서 아무런 것도 가지지 못하고 돌아와 철도 직원으로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듯이 살아가던 조르주는 그 이름의 변화와 함께 성장을 시작한다. 사실 그의 첫모습은 사랑스러울 정도다. 그는 그다지 야망도 없었으며, 좀더 편하게 살길 바랐던 것이 전부였다. 월급날에 매달려 식사 한 끼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것에 힘겨워 했던 것 뿐이다. 그러나 그는 전쟁시 동료였던 포레스티에를 만나고 변해버리게 된다. 누군가는 그의 잠재워졌던 본성이 일깨워진 것 뿐이라 하겠지만, 만약 그가 포레스티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미남이지만, 스스로가 미남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무기로 휘두르지 않으며 살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주인공 앤드리아가 지미추의 신발을 신으면서 패션과 아름다움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장면과 비슷하다. 조르주는 포레스티에가 빌려준 돈으로 멋진 야회복을 빌려입고 거울속에 비친 자기 모습에 감격해 마지 않는다. 앤드리아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생각해 되돌아온 것과 달리, 조르주는 자신의 원하는 바가 바로 그곳에 있기에 계속 나아갔다.

그에게 여자는 '신분상승의 수단'만이 아니었다. 포레스티에가 보드렉의 정부인 마들렌을 지참금까지 받아서 데리고 살면서 자신의 신분을 높였던 것처럼, 그도 여자를 통해서 한 단계 위로 올라갈 수 있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에도 충실했다. 여자는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대상이기도 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말과 시선으로서 상대방을 자극시켜야만 자신에게 넘어오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멋진 얼굴과 몸매는 상대에게 거짓사랑고백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빠지게끔 만들었다. 너무나 쉬웠던 것이다. 아무 것도 어렵지 않았기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가 누군가에게 고백을 할 때는, 비록 거짓이기는 하나 그 순간만큼은 상대를 통해 욕망을 채우고자하는 강렬한 진심이 있었다. 그렇기에 상대도 그런 조르주에게 빠졌던 것인지 모른다.

또, 그는 매일 매일 성실히 출근을 하고 그곳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 해야만 월급이 나오는 세계만 알고 있었으나 정작 그보다 더 많은 월급을 주는 신문사에 들어가서 계속 게임에 빠져서 정작 일은 대충대충 해버리는 사장과, 회사에서 놀다가 밤에 아내가 불러주는 대사를 옮겨 적어 신문기사로 만드는 친구를 보게 된다. 그들이 소위 말하는 '사교계의 인사'들이란 것이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리고 정작 중요한 '일'은 저녁식사와 무도회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비방하거나 아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는 그러한 생리에 잘 맞는 인간이었다.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고 그대로 흡수하고 배워나갔으며, 잘 써먹었다. 아름다운 남자 조르주는 멋진 얼굴과 몸매를 강력한 무기로 휘두르며 다른 이보다도 더 빠르게 그 세계에서 성장하였고, 매번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더 나아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결혼, 정부, 재혼, 친구의 죽음, 유산분배, 법...단 한번도 실수하지 않고 매번 가장 탁월한 선택을 통해 탁월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가 마음의 거리낌으로 머뭇거렸다면 3년의 시간안에 철도 직원에서 남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면, 누군들 그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구나 성공을 바란다. 그러나 성공에 이르는 몇가지 요소를 갖추지 못했을 뿐이다. 기회, 운, 비정한 마음, 순간적인 결단... 그가 분명 비도덕적이긴 하지만, 사실 누구나 비도덕적인 부분이 있다. 우리 사회의 인사들 중에서 한없이 도덕적이기만 한 성공자가 과연 있을까? 난 그래서 조르주가 능력자라고 생각한다. 신문기자로서 활동하면서 사교계 인사들을 꿰뚫고, 상대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으며, 권력의 시종노릇도 비굴하지않게 해냈으나 자신이 치고 올라갈 수 있을 때는 가차없이 상대를 눌렀다. 왈테르의 말대로, 그는 어떻게든 성공할 인재였던 것이다.

 

4.라셸, 마렐 부인, 포레스티에 부인, 왈테르 부인, 쉬잔

조르주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에두아르 마네가 그렸던 지쳐보이는 그 점원이 있는 술집이다. 신사에게는 하룻밤 유희가 되고 창녀에게는 돈벌이가 되고 점잖은 숙녀들이 상스럽다며 고개를 찌푸리지만 한번쯤은 호기심이 솟는 곳이다. 조르주는 그곳에서 창녀 라셸을 만난다. 하룻밤 상대로 족하다. 돈까지 깎아가며 라셸을 안은 그는 그 다음으로 마렐 부인을 노린다.

 남편은 6주에 한번밖에 돌아오지 않고, 자신의 아내가 설마 정숙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그런 것들을 생각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마렐 부인은 남편이 집에 있을 동안만 잠시 고행을 한다고 생각하며 자유분방하게 사는 여자다. 그러나 실은 남자에 대한 욕망이 강하고, 깊게 생각하기 보다는 순간순간의 유희에 몸을 맡긴다. 겉으로는 마렐 부인 또한 얌전한 사교계의 숙녀일 뿐이다. 마렐 부인은 조르주에게서 '정부로서 참 좋은 여자'로 평가받으며, 읽는 독자에게도 그렇게 다가갈 수밖에 없는 여자다. 라셸을 통해 조르주의 성격을 알고, 결혼을 통해 한 번 버림받았으며, 왈테르 부인에 의해 바람둥이임을 알게 되고, 쉬잔에 의해 또다시 내쳐졌으면서도 다시 한 번 결혼식장에서 은밀히 손을 잡는 그녀. 과연 조르주가 마렐 부인을 이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은 마렐 부인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조르주를 이용했던 면이 더 크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가 하면 포레스티에 부인 마들렌은 가엾기까지 하다. 아름답고 명철하기까지 했으며, 성공을 위해서 유명 인사들의 정부가 되기도 서슴치 않았다. 마들렌은 조르주에게 그 사실을 은연중에 알리고 결혼이란 공동생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남자의 이름에 숨어서 신문기사를 작성하고, 자신의 가정으로 사교계 인사들을 초대하는 것뿐이다. 내조라는 말밖에는 그녀의 행동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남편을 잃고 조르주를 선택할 때, 그녀는 분명 포레스티에와 조르주가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높이 끌어올려줄 수 있는 남자. 그러나 조르주는 포레스티에 보다 야망이 컸고 언제든 마들렌을 내칠 수 있었다. 조르주는 자신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다른 여자를 노린다.

라셸, 마렐 부인, 포레스티에 부인이 점잖기는커녕 그러한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하고 싶은대로 하는 사람이라면 왈테르 부인과 쉬잔은 정반대이다. 왈테르 부인은 남편에게서 사랑을 느껴본 적은 없으나 여자로서의 삶에 순응하고 숙녀로서 자라난 부인이다. 자신의 유대인 남편을 잘 내조하여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이끈 현명한 여인상이었으나 그녀 또한 조르주의 장난으로 타락에 빠져든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을만큼, 그를 위해서 이용당한다 해도 무엇 하나라도 해주는 일이 기쁨이 되어버린 왈테르 부인은 자신의 딸이 조르주와 결혼하게 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러나 그 절망은 어디까지나 어머니로서의 슬픔이 아닌 연적으로서의 질투다. 종교에서 구원을 찾았으나, 그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자신의 욕망을 인식한 왈테르 부인. 그녀가 조르주를 몰랐다면 현숙한 여성으로서 삶을 마칠 수도 있었을 텐데.

왈테르 부인의 딸 쉬잔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다. 그녀는 조르주의 발판이 되어줄 계단에 불과하다. 단지 자신의 아버지가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권력이 될만큼 거대한 부를 지녔기 때문에 쉬잔은 조르주에게 선택된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열정을 꾸며낸 말 한마디에 조르주와 도망칠 정도로, 쉬잔은 어리고 어리석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쉬잔을 선택한 조르주의 행동만큼은, 뭐라 변명해줄 수가 없다.

 

 

5.노르베르 드 바렌

이 노시인은 자신 앞에 놓인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는 유일한 인물이다. 바렌은 조르주가 사교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그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추구하든 허무하다고 말한다. 모파상은 이 소설에서 배경 중간중간에 그러한 '허무'를 내비쳤다. 특히 마들렌과 마차를 타고 자신의 고향으로 가면서 즐기는 모습에서, 마치 그들을 금방이라도 사라질듯한 투명한 유령과 같이 묘사한 부분이 가장 강렬하다. 비록 그들은 지금은 서로를 애타게 찾고 사랑하지만 서로를 이용할 뿐이며 다시 헤어질 것이다. 또 조르주가 그 어떤 성공을 이룬다해도, 결국 바렌의 말처럼 죽을 것이다. 모두에게 평등한 죽음이다.

바렌은 그처럼 모든 것이 허무하고 의미가 없기에 결국 '시'만이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그러나 그 또한 그리 고결한 영혼을 지닌 것은 아니다. 모파상의 전소설에서 보여줬듯이, 그또한 그저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 구원받을 한 가지가 남아 있었던 것 뿐이다. 그는 시를 통해서 스스로를 구하려고 하였고, 또 시를 통해서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조르주는 바렌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알았고, 포레스티에를 통해서 경험했으면서도 그렇기에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욕구를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바렌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허무'를 해석한 것이다.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면 대체 감내하고 인내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조르주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가졌어도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듯, 지켜야 할 것이 없는 듯 행동했던 것이다.

 

7.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대성당에서 쉬잔과 결혼식을 올리며, 조르주가 떠올리는 것은 마렐 부인이다. 이불속에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에 귀여운 얼굴로 있는 마렐 부인. 그것이 조르주의 본질 정도이다. 나는 조르주를 욕할 수 없다.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가 가진 능력이 없을 뿐. 나는 요즘들어 더더욱 그것을 부러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욕할 수는 없다. 그저 질투를 느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글을 쓰는 모파상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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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파라다이스
강지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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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처음보는 책인데도, 중간의 두 챕터는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는 소설이었다.

단편으로 어딘가에 실려있던걸 본 모양이다.

호러가 섞인 글이라고 해서 여름의 섬뜩함을 기대하고서 읽게 되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기대 이상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기대 이하이기도 하다.

 

1.더러움과 잔인함.

어째서 생명에게 저질러지는 행동에는 잔인함과 더러움이 함께 있을까? 인간들이 이토록 잔인하게 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소름끼치면서도 동시에 비현실적인 잔임함에 무디게 읽히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비현실적인 더러운 잔인함이 분명 어딘가에서는 존재할 것이고, 또 종종 TV에서 나오기도 한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세상 어딘가에 있을 현실이란 생각이 든다.

이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또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SM클럽으로의 초대'라는 소설을 떠올리게끔 하는 단편은 단순히 독특한 성적 취향을 벗어나서, 그 존재 자체가 잔인함이 쾌감이 된다는 방향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근친상간의 요소나, 전선으로 사람을 익혀서 죽여버리는 행동, 소변으로 가학을 하거나...이러한 부분들이 정말 더러워서 읽기 힘들 정도였다.

어찌나 평이한 어조로 그러한 상황을 써나갔는지, 읽으면서 작가의 생각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2.반전과 희망없음.

보통 영화에서 기대하는 반전은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나오는 반전은 그러한 반전이 아니다.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결국은 살아남고 마는, 그러한 반전을 나도 읽으면서 알게모르게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강지영의 소설에 나오는 반전은 언해피엔딩을 향한 반전이다. 그리고 대체 왜?라는 생각이 드는 반전, 왜 굳이 이런 반전을 썼을까 싶은 반전도 많았다.

스릴러를 읽을 때의 쾌감은 주인공이 살아남으리라는 기대 때문이 아닐까. 그런 빤한 결말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이렇게도 족족 독자의 기자를 배신하는지.

어떤 사람에게나 기벽이 있기 마련이라고 하고, 또 그러한 기벽이 잘못된 상황과 만나면 기가 찰 정도로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평범한 사람도 그렇게 변할 수 있으리라 싶어 인간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게 된다.

 

서늘함이 다가오는 계절이기에 이 호러가 더욱 잔인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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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 실크 팩토리
타시 오 지음, 황보석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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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 실크 팩토리-씨실과 낱실의 화자들.
한 번 읽어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에 꼭 두고 다시 보고 싶은 책인, 이 책.
세 명의 화자 재스퍼, 스노, 피터는 각각 조니의 아들, 부인, 친구이다.
이 세 명의 화자는 각기 자기만의 시선으로 조니를 바라본다. 재스퍼에게 있어서는 아버지이긴 하나 가장 악랄한 인간이다. 그는 본래부터 그렇게 태어난 인간이다. 천성이 그렇기 때문에 악한 행동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아들로서 본 조니의 모습이다. 아들을 쉽게 때린다거나,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도 그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신격화 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한 행동이다. 그는 평면적일 정도로 악한 캐릭터이다.
그러나 조니의 부인 스노에게 있어서 조니는 열등감에 사로잡히 '배우지 못한' 자다. 사업자로서는 성공을 거두었을지 몰라도, 그는 그러한 성공을 자신의 직위로서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부유층으로 타고나지 못하여 그러한 세계에서 언제나 어색한 이방인으로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조니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도, 절대 그를 자신은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겁이 나서일까, 아니면 너무 사랑해서일까, 자신에게는 손도 대지 못하는 자신의 남편에 대해서 스노는 인격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뻔히 조니가 보는 앞에서 마모루와 (성인 쿠니치카로 부르지도 않는다. 이름으로 부르는 행동은 애정 깃든 표현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거리낌없이 즐기는 스노. 아름답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행동거지 또한 숙녀다운, 그녀는 편협적인 사고로 한편으로는 가엾게 한편으로는 무시하며 조니를 바라본다.
친구인 피터에게 조니는 순수한 인간이다. 어쩔 수 없이 조니를 둘러싼 환경으로 인해 살아남으려고 투쟁하였을 뿐인 하나의 인간. 자신의 부인 스노를 지키고자 하고, 누가 아비인지 모르는 재스퍼를 사랑하고 아끼며,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그것을 메꾸려고 노력하는 그 시대의 한 인간이다. 그리고 피터 자신이 스노를 사랑하며 그 사랑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드러내는 걸 알면서도 친구의 사랑을 감내하고 오히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선한 사람이 바로 조니인 것이다.
결국 재스퍼는 피터의 아들이고, 조니는 자기 부인과 자기 친구 사이에 낳은 자식을 그토록 사랑하고 아꼈던 것일까? 아마 조니는, 소설 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서도 결코 스노에게는 손을 대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비가시광역이 있다. 눈에 보이는 가시광역만으로 상대의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에게 보이는 모습이 상대의 전부는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 악랄할 수 있고, 노력하나 적응하지 못해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숭배 대상이 되기도 하며, 한없이 순수하나 그것을 시종일관 지니고 있을 수는 없다.
조니의 '하모니 실크 팩토리'라는 직물 공장은 세 명의 화자의 이야기가 섞여 비로소 주인공 조니의 삶이 드러나는 이야기 전개방식에서 유사점을 가진다. 면직물이 짜여져 나가는데는 한 방향의 실만이 필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세 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해주어도, 정작 조니 자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조니가 정말 어떠한 인간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인간 모두 그러하듯, 조니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하나의 면만이 보이듯, 그 모든 면면들이 바로 그 인간 자신이고, 또 상황에 맞부딪칠 때 새롭게 속에서 나타나는 면들이 있는 것이다.
단 하나의 성질만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과 계급적 관점에서 보았던 스노에게 조니는 부족한 인간이었고,
학문과 사건 중심으로 보았던 재스퍼에게 조니는 악랄한 인간이었고,
예술과 순수에 가치를 두고 보았던 피터에게 조니는 맑은 영혼을 지닌 인간이었다.
내가 무엇으로 상대를 보느냐에 따라, 상대 또한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무언가 해결되지 않아 답답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결국 살아남고자 저지른 행동도 모두 피해자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하니는 게이였던 걸까? 쿠니치카는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하니는 대체, 왜 그렇게 중요한 역할로 나와서 아무 것도 못하고 사라진 건지! 아! 답답해! 누가 속시원히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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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듯 시크하게 Nobless Club 17
한상운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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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소설이라는 룰에 충실한 책인 것 같다.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게 읽어내렸고, 시간이 지나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었다.
재미있는 책을 읽어서 기분이 좋은 하루가 되었다.

"살인의 추억"이나 "공공의 적" , "거북이 달린다" 영화의 영향 때문인지, 우리나라 강력계는 배불뚝이에 조금은 게으르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 일하는 샐러리맨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무심한듯 시크하게'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조금 다른 점이라면, 대시만 해도 여자들이 껌벅껌벅 넘어올 정도로 잘 생긴 젊은 형사라는 것이다. 쌈질도 좀 하고 범인에 대한 감은 절대 틀리는 법이 없다. 무능함의 대명사였던 대한민국 강력계에 새바람이랄까.

문제라면 남들 다 하는 소박한 연애를 즐기고 싶으면서도 술마시고 원나잇밖에 할 줄 모르는 귀차니즘과 열정없음이다. 이 부분에서는 영화들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

그런 그가, 돈많고 똑똑하고 잘생긴 의사, 몸매 좋고 요리도 잘 하고 음악도 연주하며 쌈질까지 잘 하는 마약판매인을 알게 된다.  대체 왜 이런 가질 거 다 가진 놈이 마약을 팔고 다니는 거야, 라고 투덜거리지만 그의 삶에 하나 둘 씩, 접근해가면서 그 또한 그리 만만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거저 앉아서 들어오는 것은 없다는 걸 깨달은 걸까.
무심한듯 시크하게..
무심한 척 하지만, 사실은 너무나 세련되게 겉을 꾸밀 뿐이다. 실제로 삶에 대해서 시크해 보이는 사람은 절대 무심하지 않다. 시크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필살의 노력이 필요한 우리나라니까.

조금은, 무심한 척 하면서 시크하게 살아내보고 싶다.
아등바등 이악물고 살아내야만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시크한 척 하는 범인과 무심한 형사의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하게 읽혔는지도 모른다.

줄거리를 다 늘어놓아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는 또 다른 것 같다. 전철 안에서 내릴 역을 놓칠 뻔하면서 하루만에 읽어내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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