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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원 문록’ ‘변영만 전집’ 나란히 번역 출간
입력: 2006년 06월 15일 18:09:41 : 3 : 0
 
현재 전하는 문집만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우리 한문학의 역사는 통일신라 최치원 이래 1,000여년을 헤아린다. 그 사이 명문장가들이 속출했다. 고려의 이규보·이제현, 조선의 한문사대가(이정귀·신흠·장유·이식), 정조 연간의 사가시인(박제가·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이 널리 알려진 작가들. 한말 왕성순은 역대 한문 문장가 가운데 ‘베스트10’을 뽑아 그들의 글을 ‘여한십가문초’로 엮어내기도 했다.

위당 정인보 선생
그렇다면 한문학의 마지막 작가는 누구일까. 학계에서는 위당 정인보(1893~1950)와 산강 변영만(1889~1954)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당과 산강의 학문 이력은 상당히 달랐다. 명문가 출신의 위당이 역사와 전고(典故)에 밝은 정통 한문을 구사했다면, 전통 한학에 서양 근대 교육을 함께 받아들인 산강은 근대 신지식을 한문에 녹여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한문학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면서도 서로 다른 색깔을 지녔던 위당과 산강의 문집이 나란히 번역됐다. 정양완 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77)가 위당의 한문 문집을 번역한 ‘담원문록’(전3권·태학사)을 펴낸 데 이어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는 산강의 모든 글을 수집, 현대어로 옮긴 ‘변영만 전집’(전3권·성균관대출판부)을 출간했다. 정양완 교수는 위당의 셋째딸이며, 실시학사를 이끌고 있는 이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81)는 산강을 사사했다.

정양완 교수가 번역한 ‘담원문록’에는 행장·전(傳)·제문·묘비문·편지글·서문·한시 등이 담겨 있다. 원래는 필사본 상태로 있던 것을, 연세대에서 1967년 1차 영인본을 냈다가 83년 ‘담원 정인보전집’을 편찬할 때 전집 제5, 6권으로 포함시켰다.

‘담원문록’의 첫글은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로 경술국치 당일 날 목숨을 끊은 홍범식의 일을 적은 ‘금산군수 홍공의 사장’이다. 홍범식의 의로운 행위를 기록에 남기며 나라를 잃은 슬픔과 한을 삭이려 한 위당의 충정이 잘 드러나는 글이다. 또 위당은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석략’이나 낙랑군의 강역을 논한 ‘정무론’(正誣論)과 같은 역사 논문을 통해 우리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촉구하기도 한다. 또 정약용, 신경준, 홍대용, 정상기 등의 저술에 관심을 보이며 실학 연구의 불을 지폈다.

1999년 이후 7년 만에 번역을 마친 정교수는 “아버지의 글을 어느 하나 데면데면 쓴 것이 없다”며 위당의 대표적인 글로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묘지문인 ‘유릉 지문’을 꼽았다.

‘변영만 전집’은 산강의 한문문집 ‘산강재문초’와 한글로 쓰여진 산문과 시를 현대어로 다듬은 ‘계황산문집’으로 구성돼 있다. ‘산강재문초’는 산강 사후 1957년 창원에서 간행된 것으로, 한글번역본에는 추가로 발굴된 작품들을 보유편에 추가했다. 번역은 실시학자 회원인 젊은 한문학자들이 맡았다.

신강 변영만 선생

산강의 문장에서는 신구 문명이 교차하는 전환기의 한 지식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한문학에 정통하면서 영문 서적을 읽을 정도로 영어 실력을 갖춘 산강은 ‘사사로운 기록’(私記)이라는 글에서 동서양의 문학이 서로에게 자극이 될 수 있음을 얘기한다. 또 ‘타고르 문집 뒤에 쓴 글’에서는 “노벨상을 수상한 타고르의 문장이 진실성이 없는 것은 동족을 외면했기 때문”이라며 문학적 명성에 앞서 핍박 받는 동족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산강재문초’의 해제를 쓴 김진균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근대적 문학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대부분의 한문 지식인과 달리 산강은 고전과 근대를 관통하여 남다른 경지를 성취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성대 대동문화연구원(원장 임형택)은 ‘변영만 전집’ 발간을 기념해 16일 오후 인천 구월동 인천문화재단에서 산강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연다. (02)760-1275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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