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독서 - 책을 읽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다 여행자의 독서 1
이희인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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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벽, 그리고 붉은 노트. 두건(?)을 뒤집었쓴, 사연이 있는 듯한 여자의 하늘거리는 포즈.
시선을 사로잡은 이 책, 마음이 가는 대로 손을 뻗다.



당신의 배낭에는 어떤 책이 있습니까?


지금 내 가방 안에는 <나는 치명적이다>라는 책이 있다. 대한민국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과 이야기를 담은 책, 가만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에너지가 넘치기에 종종 들고 나오는 책이다.


이 저자의 가방에 담겼던 책들은 내가 읽은 책들(금각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등)도, 읽지 않았지만 들어본 책들(자정의 아이들, 월든, 내 이름은 빨강,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등)도, 들어보지도 못한 낯선 책들(불볕속의 사람들, 끝없는 벌판, 인듀어런스 등)도 있다. 


저자가 선택한 여행지, 그 땅과 닮은 책들이라 낯선 작품들이 꽤나 있었는데 글 전에 펼쳐지는 사진으로 한번 그곳의 느낌을 읽자 글을 읽자 책들이 가진 이야기들이 그리 생경하지 않았고 새로운 이야기들에 흠뻑 빠져들게 됐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내 독서가 얼마나 얕고 편협했나를 깨달았다. 문학이 주는 덕목이 인간의, 삶의 이해라면 나는 우리나라 사람과 물 건너 옆나라 사람과 영어 쓰는 사람만 이해해 왔던 게다. 


내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땅에서, 질식할 듯한 생의 압박에 허덕대는 사람들이, 사막과 남극 같은 한계의 정점에서 드라마같은 삶은 사는 사람들이, 민족과 종교 등의 대립으로 첨예한 갈등의 한 가운데에서 숨죽여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자는 그 땅을 읽느라 책을 읽기가 힘겨웠노라 얘기한다. 사람을 읽느라 이야기를 읽기가 버러웠노라 말한다. 
이 책을 읽다보니 읽지 못한 책들을 다시 꿈꾸게 되었다. 여행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가보지 못한 땅에 대한 꿈을 다시 꾸게 될 것이다. 


여행이고 책이고 사람을 변하게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의.미.심.장.하다. 우선 나의 독서리스트에 큰 영향을 주었고, 터키에 대한 잊어버린 꿈을 다시 꾸게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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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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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모여드는 모양이다. …… 그러나 나는 오히려 여기서 죽어간다고 생각될 뿐이다.

이 도시는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높은 빌딩과 수많은 집들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거나 손을 잡을 사람은 없었다. -33p

일 년 만에 이 도시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 도시를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 도시 구석구석을 내 발로 걸어다녀야겠다고. -48p

신경숙의 소설에서는 낯선 도시 서울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있다. 어느 책이었던가 서울역에 내렸을 때 맞닥뜨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주욱 빌딩벽을 타고 올라가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이 대우 빌딩이라 했던가. 이 책의 시작도 서울에 대한 외경에서 시작이 됐다. 20의 청춘이 낯선, 광대한 도시에 던져질 때 그 방황과 혼돈은 극에 달한다. 나는 그랬다. 나는 윤이 보여주는 경계심와 소극성과 두려움을 이해했고 그래서 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느린 책의 계속되는 정체를 견디며 느끼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여러분은 각기 크리스토프인 동시에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험난한 세상에서 온갖 고난을 헤쳐나가며 강 저편으로 건너가는 와중에 있네. 우리 모두는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치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여행자일세. 우리는 무엇엔가에 의지해서 이 강물을 건너야 해.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법은 무엇이겠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는 것일세. -63p


스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스스로 살아가는 인생의 시발점이다. 윤교수는 학생들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화두로 던졌다. 그리고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자고. 여기에서 궁금했다. 왜 단과 미루는 상실됐을까. 개인의 관계망을 넘어서 더 거대하게 움직이는 역사와 시대의 운명이 이 책에서는 조연으로 바탕에 깔리지만 그 운명이 네 인물의 생을 갈라놓는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운명이라는 것이 개인의 의지 따위를 덮어버리지만.

내가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에 빠지곤 했다. 그동안 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 먼지요 실체 없는 바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내장을 갉아먹히는 듯한 쓰디쓴 괴로움을 안겨준다. 그 너머 웅크리고 있는 밤바다를 대할 때마다 나는 마치 내 자신의 어두컴컴한 내면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에 빠지곤 한다. -248p

 
마음과 마음이 끊어지는 순간은 치명적이고도 절박하기에 기억하기조차 두려울 때가 있다. 단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세련되지 못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을 만큼 절박했다. 인격이 살아남을 수 없는 나의 존재적 가치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공포의 가운데에 있었으니까. 단에게 그 마지막 끈이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의 윤이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미루는 에밀리와 같았던 모양이다. 고양이처럼 공간에 길들여지는 존재. 미루는 윤과 명서 단과의 꿈과 같았던 며칠의 휴가가 있었던 집을 잃고 살아갈 의지를 놓았다. 그리고 명서는 윤에게 말한다.

함께 있으면 너와 나는 아플 거다. 흉측하게 될 거다. - 357p
 


청춘이 사랑을 접기란 손바닥으로 달을 가리는 것만큼이나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함께 안고가야 할 기억이 기혹했기에 그 둘은 따로 살아가기로 했나 보다. 돌아보면 스물은 너무 극적이고 외로웠다. 단독자인 고뇌자들이 그렇게 강한 자성으로 서로를 밀어내고 끌어당기고 하면서 상처를 주고 받았다. 결국 윤과 명서는 스물의 기억으로 서로에게 남아 각자의 방식으로 생을 살아낸다. 다시 스무 해가 지나고 여문 생들이 다시 만나고 윤은 자기 삶의 큰 에너지 그 스물의 생채기에서 발원했음을 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길 바랍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관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끊임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291p

 

함께 있을 때면 ‘오늘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은 사람을 갖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언제든 ‘내가 그쪽으로 갈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 365p

 

우리는 어떻게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될 수 있을까. 이미 잊어버린 ‘내가 그쪽으로 갈게’의 다정함과 ‘오늘을 잊지 말자’의 생의 절정의 순간들. 내가 왜 청춘,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를 집어들었을까의 대한 답은 독서 말기에 찾아왔다. 내 생의 절정의 순간들, 그것들에 대한 향수. 그리고 다시금 생각한다. 그때의 열정과 에너지가 다시 나를 걷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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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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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1Q84> 1,2권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일 년이 지났다. 앞의 두 권을 먼저 읽어야하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다음 이야기에 목말라 3권을 바로 집어들었다. 하루키는 놀라운 구성력을 가진 것인가, 나의 기억력이 흡족할만한 것인가, <1Q84>의 이야기 흡입력이 위대한 것인가. 읽다보니 스토리가 머릿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하나하나 던져지는 단어와 문장들이 오묘하게 짜깁기가 되면서 촘촘한 서사의 그물망이 펼쳐진다.

 

위기의 아오마메는 덴고를 찾고 헤메고, 그녀를 쫓는 우사카와는 덴고의 주변을 서성이며, 덴고는 긴박한 자기장에서 살짝 비켜나서 만날 듯 말 듯 아오마메 주위를 맴돈다.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3권 역시 빠르게 읽힌다. 그럼에도 긴장감과 궁금함에 혼자 초초해진 나는, 더 빨리 읽어내지 못하고 더 빨리 이야기를 섭취해내지 못하는, 내 정독의 독서습관이 읽는 내내 밉고 한탄스러웠다.

 

아오마메와 덴고, 그들은 과연 만나는가. 점점 좁혀오는 우사카와의 수사망은 결국 아오마메의 덜미를 잡는가, 선구는 왜 아오마메를 원하는가.

결론은 말해줄 수 없다. 단 한 가지 알려줄 수 있는 건, 마지막 멘트가 <1Q84 끝>이 아니라 <1Q84 3권 끝>이라는 것!

아직 <1Q84> 탐독의 즐거움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4권이 나온다면 기꺼이 1권에서 3권까지 음미하며 복기할 수 있다. 4권을 기다리기까지가 고역이라면 고역일 것!

 

1,2권에서 독특한 서사와 또 이를 만들어가는 구성에 탄복하였다면 3권에서는 이에 덧붙여 상서롭지 않은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되는 작가의 통찰력 있는 메시지에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나갔다.

 

당신은 언제까지고 거기 숨어있으면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죠. 좋아요, 숨어 계세요. 하지만 아무리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어도 누군가가 반드시 당신을 찾아냅니다. -121p

 

이 NHK수급원은 대체 무엇인가. 덴고의 아버지의 환영인가. 이 환영이 아오마메와 우사카와에게는 왜 실체로 나타나는가. 이것은 이야기를 떠나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한 것이어서 더욱 섬뜩하고 위협적이었다. 나 역시 문을 노려보는 아오마메처럼 책장을 노려보며 불쾌한 장담을 하는 그와 기싸움을 펼쳤다. 내가 피하고 있는 것, 그것은 분명 나를 찾아낸다!

 

이건 아마도 영혼의 문제일 것이다. 깊이 생각한 끝에 우시카와는 그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후카에리와 그 사이에 생겨난 것은 말하자면 영혼의 교류였다. 거의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아름다운 소녀와 우시카와는 위장된 망원렌즈의 양쪽 편에서 서로를 응시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깊고 어두운 곳에서 이해했다. 그녀는 아득히 깊은 곳에서 나를 이해했던 것이다. 우사카와는 그렇게 느꼈다. - 463p

 

우사카와는 직관적으로 이것이 사랑임을 안다. 이는 사랑에 대한 환기를 나에게 제시한다. 눈과 입술과 몸으로 하는 사랑이 아닌 깊은 응시와 이해를 통해 완성되는 사랑. 우사카와에게 후카에리가 던진 시선은 치명적인 사랑으로 우사카와를 흔들어놓고 사라진다. 포유류 이상인 인간에게 사랑이란 모름지기 이런 것! 이라고 하루키가 일러주는 듯하다. 바닥 깊은 곳까지 뚫어보는 타자에 대한 몰두와 긍정적 일체감.

 

당신들의 인생은 당신들에게는 분명 소중한 의미가 있겠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도 할 거야. 하지만 나한테는 있으나마나 전혀 아무 상관없는 인생이야. 나한테 당신들은 무대에 그려진 풍경 앞에 스쳐가는 흐늘흐늘한 종이인형일 뿐이야. -469p

 

인간은 윤회한다고 믿고 싶은 이유 중 하나가 그거였다. 이토록 소중하고 의미 있는 육십억 각각의 존재들이 한낱 일회적인 생에 불과하다면, 백년도 못 살고 사라져버린다면 이 육십억은 얼마나 큰 낭비인가. 그러나 육십억의 괴로웠다. 모두가 모두에게 말이다. 우사카와가 모두를 종이인형이라고 지정하듯. 그럼에도 온기를 나누는 종이인형이길 바라는 게 백년의 시간을 허락한 누군가에 대한 보답이리라.

 

거기서는 인간의 죽음에 항상 깊은 애도를 표한다. 그건 참으로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인간의 죽음은 모름지기 애도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라 해도. - 631p

 

최근 <애도하는 사람>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참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을 응대할 수밖에 없거늘, 이 거창하고 외롭고 무거운 주제를 살짝 비켜가, 애도하라, 고 얘기를 했다. 그래서 나는 그 큰 주제를 기꺼이 접어둘 수 있었다. 하루키도 말한다. 애도하라,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이거면 된다라고 위안하듯. 흠. 이게 요즘 일본 사회의 분위기인가.

 

"그를 만났다 치고, 그럼 미끄럼틀 위에서 대체 뭘 하지?“

“둘이서 달을 봐요.”

“매우 로맨틱하군.” - 655p

 

이 책에 이런 소박하고 스산한 로맨틱함이 있어 고맙다고나 할까. 하루키식 블랙코미디, 비교적 소프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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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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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여성인 나에게는 어쩔 수 없이 불편한 요소들이 이 작품을 완성하고 있다.

늙은 페니스, 십대 소녀의 섹스, 서로를 견제하는 두 남자의 관음증……

농밀함이 담긴 함축적인 일러스트와 산뜻한 캘리의 제목자에 이끌려 집어든 책이었다. 인물들의 엇갈린 시선, 살짝 들어올린 치마끝과 발꿈치, 말과 커튼, 안으로 접힌 표지 안에 등이 굽은 채 않은 늙은 남자, 그리고 은밀한 이름 은교!

 

어쩌면 이 표지는 이미 나에게 ‘불편할 것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꾸 말을 거는, 유혹적인 은교의 자태에 첫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저자의 요청에 따라 밤의 숨결만으로 이 책을 읽어나갔다. 밤은 은교를 이해해주리라. 그러나 밤은 잠을 부르고... 소설 한 편을 열흘에 걸쳐 마감하는 기록을 세웠다. 은교... 여러 밤 나를 시험하고 의구심이 들게 했으며 나와 눈빛을 마주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나는 은교가 불편했다. 무엇보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건 여성을 바라보는 정체된 시선때문이었다. 은교가 노시인의 노트를 읽고, 왜 얘기하지 않았냐며, 내가 뭐라고... 하는 부분에서 나는 성녀 아니면 창녀의 공식을 깨지 못한 작가의 폐쇄적 시선에 당혹스러웠다. 십대 소녀 은교는 마흔에 가까운 남자와 관계를 맺으나 여기에 은교의 입장은 어디에도 없다. 싫다고 하면서 밀어내면서 술에 취한 그녀는 무감하게 성의 대상이 되고 둘 사이에는 어떤 교감도 이해도 없다. 이것부터가 나는 왜곡된 시선이라고 본다.

 

어디에도 은교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제목은 은교였으나 그녀는 중심이 아닌 두 남자의 공통의 대상이었다. 의아했던 건 은교가 두 남자가 서로를 사랑했으며 자기에게는 자리를 주지 않았다, 라는 하소연. 이즈음에서는 지성인 두 남자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젋은 여자에 투사가 됐다는 것인가 뭔가. 싶어 덮어버릴까 싶기도 했다. 다행히 저자는 논점을 비켜가지 않았다. 다시 은교를 중심에 두고 두 남자는 은교를 욕망했다.

 

노인의 사랑을 거부하는 건 아니다. 영혼이 있는 생명이 욕망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도 늙어질 테고, 늙어서도 사랑하고 싶다. 몸이 열정을 못 따라오면 아마 장탄식을 하면서 괴로워할 것이고 마지막 사랑에 달뜨며 하루를 일년처럼 살아내겠지. 그래서 노시인은 아프게 읽었다. 저자는 충분히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짰고 서사는 흥미로웠고 노시인와 서지우에 관해서는 깊었다. 그들을 향해, 나의 늙음을 행해 연민을 가졌다.

 

문제는 은교다. 은교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면 남자에게 빛나는 허벅지와 단단한 젖꼭지 이상일 수 있다고 기대한 내가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른다. 대체 맑은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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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나는 당신 안에 머물다 - 그리며 사랑하며, 김병종의 그림묵상
김병종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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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어느 신에게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또한 그래서 모든 말씀에 열려 있기도 하다.

법정 스님의 법문집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을 읽으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나는 <오늘밤, 나는 당신 안에 머물다>를 통해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그리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매주 성당을 다니곤 했지만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에 올라오면서는 성당에 나간 적도 없고 기도를 해본 적도 없고 성경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어느날, 신앙이 내게로 왔다' 였다. 

물론 그 이전부터(아이를 낳으면서부터였지 싶다) 다시 성당을 나가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했었다.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를 몸으로 눈으로 확인하면서 나처럼 우둔하고 미약한 존재가 과연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살이에서 내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데 또 하나의 생명을 업고 가자면 더 큰 힘을 가진 능력자에게 기대고 의지해야 하는 건 아닌가.  

창조의 신비와 구원에의 믿음, 이런 근원적인 접근이 아닌 일신의 안위를 꾀하는 접근이어서였는지, 최근 몇 달동안의  성당출입은 수많은 의심만을 양산하면서 장렬히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과연 나는 그이에게 복종할 수 있을까? 그이가 준비했다는 나의 삶, 내 가족의 삶, 주변의 모든 관계들을 모두 그이의 뜻이라 믿고 겸허히 수긍하며 따를 수 있을까. 열심히 기도를 하면 답을 주신다는데 정말 기도만이 답일까. 그렇다면 나는 비주체적이고 비인격적인 존재인 것인가. 어디까지가 신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영역인 것인가. 어쩌면 신앙인들에게는 중요치 않은 의문일 수도 있는 이런 점들이 다시 일요일을, 늦잠을 자고 대강 두 끼로 하루를 때우고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하는 날로 돌이켜버렸다.

 

어설픈 비신앙인의 신앙고백이 길어진 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편견을 벗고 민낯으로 신앙인의 정서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정서가 나의 그것과 일치하는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비종교인들은 신앙인들의 정신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과학적 논리적 사고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 '믿으면 이해할 수 있는데...'는 말들은 호소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사물을 향하는, 사람을 향하는, 세계를 향하는 정서에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그 시선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경험이었고 또한 마음의 한편을 연 발전적인 기회이기도 했다.

게다가 김병종 선생님의 가슴을 울리는 아름다운 생각과 문장들은 인생의 선배로부터 듣는 혜안의 메시지로 시종 편안하면서도 묵직하게 다가왔고 질감이 살아있는 선생님의 그림은 만져질듯한 입체감으로 마음에 담겼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중에 기껏 열흘 남짓 피고 지는 꽃. 그 황홀한 아름다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리고 나면 다시 일 년의 삼백오십여 일을 기다려야 하는 운명. 그 섭리 속에 감춰진 비밀은 무엇일까. 이제는 벚꽃을 통해 나는 소멸의 슬픔보다 소멸의 아름다움을 보려 한다. 소멸의 슬픔과 소멸의 고통 너머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신속하게 지고 사라지게 마련이니 붙들려 하지 말라는 것이야말로 창조의 또다른 섭리가 아닐까 싶다.

<절정의 아름다움마다 말갛게 고여 있는 슬픔의 빛> 중에서 

‘그래, 인생은 한바탕 탱고와 같은 것이지.’ 가급적 즐겁게 살아보자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도 우리가 근심과 슬픔에 젖어 있기보다는 꽃처럼 활짝 피어 아름답게 빛나기를 바라시지 않을까.

<인생은 한바탕 탱고와 같은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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