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모여드는 모양이다. …… 그러나 나는 오히려 여기서 죽어간다고 생각될 뿐이다.
이 도시는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높은 빌딩과 수많은 집들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거나 손을 잡을 사람은 없었다. -33p
일 년 만에 이 도시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 도시를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 도시 구석구석을 내 발로 걸어다녀야겠다고. -48p
신경숙의 소설에서는 낯선 도시 서울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있다. 어느 책이었던가 서울역에 내렸을 때 맞닥뜨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주욱 빌딩벽을 타고 올라가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이 대우 빌딩이라 했던가. 이 책의 시작도 서울에 대한 외경에서 시작이 됐다. 20의 청춘이 낯선, 광대한 도시에 던져질 때 그 방황과 혼돈은 극에 달한다. 나는 그랬다. 나는 윤이 보여주는 경계심와 소극성과 두려움을 이해했고 그래서 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느린 책의 계속되는 정체를 견디며 느끼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여러분은 각기 크리스토프인 동시에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험난한 세상에서 온갖 고난을 헤쳐나가며 강 저편으로 건너가는 와중에 있네. 우리 모두는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치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여행자일세. 우리는 무엇엔가에 의지해서 이 강물을 건너야 해.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법은 무엇이겠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는 것일세. -63p
스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스스로 살아가는 인생의 시발점이다. 윤교수는 학생들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화두로 던졌다. 그리고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자고. 여기에서 궁금했다. 왜 단과 미루는 상실됐을까. 개인의 관계망을 넘어서 더 거대하게 움직이는 역사와 시대의 운명이 이 책에서는 조연으로 바탕에 깔리지만 그 운명이 네 인물의 생을 갈라놓는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운명이라는 것이 개인의 의지 따위를 덮어버리지만.
내가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에 빠지곤 했다. 그동안 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 먼지요 실체 없는 바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내장을 갉아먹히는 듯한 쓰디쓴 괴로움을 안겨준다. 그 너머 웅크리고 있는 밤바다를 대할 때마다 나는 마치 내 자신의 어두컴컴한 내면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에 빠지곤 한다. -248p
마음과 마음이 끊어지는 순간은 치명적이고도 절박하기에 기억하기조차 두려울 때가 있다. 단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세련되지 못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을 만큼 절박했다. 인격이 살아남을 수 없는 나의 존재적 가치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공포의 가운데에 있었으니까. 단에게 그 마지막 끈이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의 윤이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미루는 에밀리와 같았던 모양이다. 고양이처럼 공간에 길들여지는 존재. 미루는 윤과 명서 단과의 꿈과 같았던 며칠의 휴가가 있었던 집을 잃고 살아갈 의지를 놓았다. 그리고 명서는 윤에게 말한다.
함께 있으면 너와 나는 아플 거다. 흉측하게 될 거다. - 357p
청춘이 사랑을 접기란 손바닥으로 달을 가리는 것만큼이나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함께 안고가야 할 기억이 기혹했기에 그 둘은 따로 살아가기로 했나 보다. 돌아보면 스물은 너무 극적이고 외로웠다. 단독자인 고뇌자들이 그렇게 강한 자성으로 서로를 밀어내고 끌어당기고 하면서 상처를 주고 받았다. 결국 윤과 명서는 스물의 기억으로 서로에게 남아 각자의 방식으로 생을 살아낸다. 다시 스무 해가 지나고 여문 생들이 다시 만나고 윤은 자기 삶의 큰 에너지 그 스물의 생채기에서 발원했음을 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길 바랍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관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끊임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291p
함께 있을 때면 ‘오늘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은 사람을 갖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언제든 ‘내가 그쪽으로 갈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 365p
우리는 어떻게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될 수 있을까. 이미 잊어버린 ‘내가 그쪽으로 갈게’의 다정함과 ‘오늘을 잊지 말자’의 생의 절정의 순간들. 내가 왜 청춘,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를 집어들었을까의 대한 답은 독서 말기에 찾아왔다. 내 생의 절정의 순간들, 그것들에 대한 향수. 그리고 다시금 생각한다. 그때의 열정과 에너지가 다시 나를 걷게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