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갈대 > 예술을 통한 철학

이 책은 미학에 대한 전체적이고 기본적인 틀을 잡아 준다. 고대에서부터 현대 미학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미학에 대해 전혀 모르더라도 쉽게 읽을수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작품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채색기법을 사용했는지 등을 자세하게 밝히기 보다는 미학에 얽힌 철학적 사고들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때문에 등장하는 작품들 역시 그런 맥락에서 선택되었고 예술이란 무엇인가?혹은 미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각 시대마다 예술에 대한 생각들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상세히 설명한다. 미학 입문서로서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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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갈대 > 연암 박지원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열하일기'의 원본을 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국어나 문학책을 통해 열하일기의 한토막을 읽은 정도가 아닐까. 이 책 역시 열하일기의 원본 전체를 담고 있지는 않다. 리라이팅클래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전을 재평가하고 독자의 이해를 돕는데 목적을 두고있다. 물론 원본을 읽어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럴만한 여건이 충분치 않은 사람이라면 많은 도움이 될거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고미숙이라는 작가의 연암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문체가 인상적이다.

이 책은 크게 두가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하나는 연암 박지원이라는 기인이고 나머지 하나는 열하일기라는 작품이다. 연암을 다산 정약용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쪽같은 선비의 모습을 기대했다면 엄청난 착각!!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와 위트를 날릴줄 아는 조선의 코미디언이었으며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발견하는 유목민이었다. 그를 이해한다면 열하일기에 대한 이해도 반쯤은 해결된 셈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텍스트, 유머와 역설로 가득찬 공간,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역량이 모두 녹아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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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갈대 > 핵심을 찌르는 진화론

책을 읽기 전에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출판된지 30년이 된 책이, 그것도 자연과학에 관한 책이 그렇게 오랜시간동안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지에 대해서.. 결과는 나의 완전한 기우였다. 빛이 바래기는커녕 오히려 문학작품의 고전처럼 세월이 더해질수록 빛나는 저서이다. 신판에서는 기존의 10장에 3장을 덧붙여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리차드 도킨스, 그는 분명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있는 사람이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또한 자신이 주장하는 '이기적 유전자'론과 반대되는 이론들이 어떤 오류가 있는지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새로운 페러다임을 일으키며 뉴턴의 역학을 몰락시켰던 것처럼 진화의 단위를 유전자로 보는 관점 역시 그동안 정설로 여겨졌던 기존의 학설들이 틀렸다는 것을 훌륭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 중심에 리차드 도킨스가 있으며 시발점이 된 것이 이 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다. 더군다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일반인도 충분히 이해할만큼 쉽게 써져있기 때문에(가능한 전문용어를 쓰지 않았다) 별다른 사전지식 없이도 읽을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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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갈대 > 유쾌한 수학~

다 읽고나서 아주 잘 만들어진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구성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고싶다. 기하학의 발생에서부터 현재 초끈이론에 사용되기까지 기하학의 역사를 조목조목 잘 정리해 놓았다. 기하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학문이 바꿔 말해 기하학적인 사고가 수학과 과학의 발전에 얼마나 큰 역할을 알고보면 놀라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매일 기하학을 접하면서 살고있다. 우리가 밟고 있는 땅, 매일 쳐다보는 하늘..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 기하학의 주된 관심사이다. 거기에 차원이라는 항목이 추가되면 서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최근의 초끈이론에 이르기까지의 사고의 혁명, 과학의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학자들이 겪었던 굴곡의 시간들을 함께 할 수 있는 것 또한 이 책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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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갈대 > 소유의 종말, 존재로의 귀환

에리히 프롬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소유와 존재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어쩌면 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한가지, 즉 소유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프롬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우리의 선택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소유양식에 젖어 다른 삶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건전하고 생산적인 존재양식이라는 대안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프롬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시작하고 있다.

1.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복리를 가져다주지 않으며, 행복에 이르는 길도 아니고, 최대의 쾌락에 이르는 길도 아니다.

2. 자기 생활의 독립된 주인이 된다는 꿈은 우리 모두가 관료제란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어 사고도 감정도 기호도 정치와 산업 및 그것들이 지배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눈뜨기 시작했을 때 끝나버렸다.

3. 경제의 진보는 여전히 풍요한 나라에 국한되었고, 풍요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간격은 더욱더 벌어졌다.

4. 기술의 진보 그 자체가 생태학적 위험과 핵전쟁의 위험을 낳았으며, 이중 어느 하나나 혹은 둘 다 모든 문명, 그리고 어쩌면 모든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지도 모른다.

위의 문제들은 모든 자본주의 사회, 즉 소유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될 수밖에 없음을 프롬은 지적하고 있다. 소유양식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의 가치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돈, 자동차, 땅처럼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지식, 매력, 육체, 인격까지도 개인의 소유물로 인식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질보다는 양을 중시하게 되고  자신보다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함과 동시에 덜 가진 사람을 멸시하게 된다. 또 한정된 자원을 두고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경쟁하다보니 자연스레 타인에 대해 적의를 갖게 되고 이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연대감 상실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개인은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프롬은 무분별한 소유지향의 결과가 단순히 불행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멸종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인간의 탐욕은 무한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이 소유한다고 해도 결코 충분히 만족할 수 없으며 소유로 인한 만족은 그 생명력이 짧고 후에 필연적으로 공허함을 불러 일으킨다고 말한다. 이 공허함은 마치 원자폭탄이 폭발로 인해 주위의 공기를 모두 연소한 후에 만드는 진공상태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소유의 결과가 단순히 행복, 불행처럼 주관적인 감정상태라면(실제로는 착각에 불과할지라도) 지금까지 걸어온 이 길을 계속해서 고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가 생명의 상실, 즉 멸종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프롬이 제시하는 것이 인간본래의 성격으로의 귀환, 존재로의 복귀이다.

프롬의 주장이 마르크스의 그것과 상당부분 닮아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프롬도 존재지향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고 그중에서도 특히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 프롬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자주 인용하고 있으며 마르크스를 정신적인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프롬은 마르크스 사상의 몇가지 결함을 지적하면서 현대에 맞는 새롭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프롬의 대안이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프롬의 대안이 시도된 적도 없을 뿐더러 이 책이 출간된지도 거의 30년이 되었고 그 사이 세계는 급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프롬의 대안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책을 읽는 내내 30년이란 시간의 간극을 거의 느낄수 없었고 오히려 프롬의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에 거듭 탄복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 사회가 과거보다 훨씬 소유지향적이 되었음을 감안한다면 프롬의 주장은 오늘날에 더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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