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갈대 > 소유의 종말, 존재로의 귀환
에리히 프롬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소유와 존재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어쩌면 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한가지, 즉 소유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프롬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우리의 선택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소유양식에 젖어 다른 삶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건전하고 생산적인 존재양식이라는 대안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프롬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시작하고 있다.
1.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복리를 가져다주지 않으며, 행복에 이르는 길도 아니고, 최대의 쾌락에 이르는 길도 아니다.
2. 자기 생활의 독립된 주인이 된다는 꿈은 우리 모두가 관료제란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어 사고도 감정도 기호도 정치와 산업 및 그것들이 지배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눈뜨기 시작했을 때 끝나버렸다.
3. 경제의 진보는 여전히 풍요한 나라에 국한되었고, 풍요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간격은 더욱더 벌어졌다.
4. 기술의 진보 그 자체가 생태학적 위험과 핵전쟁의 위험을 낳았으며, 이중 어느 하나나 혹은 둘 다 모든 문명, 그리고 어쩌면 모든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지도 모른다.
위의 문제들은 모든 자본주의 사회, 즉 소유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될 수밖에 없음을 프롬은 지적하고 있다. 소유양식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의 가치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돈, 자동차, 땅처럼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지식, 매력, 육체, 인격까지도 개인의 소유물로 인식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질보다는 양을 중시하게 되고 자신보다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함과 동시에 덜 가진 사람을 멸시하게 된다. 또 한정된 자원을 두고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경쟁하다보니 자연스레 타인에 대해 적의를 갖게 되고 이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연대감 상실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개인은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프롬은 무분별한 소유지향의 결과가 단순히 불행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멸종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인간의 탐욕은 무한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이 소유한다고 해도 결코 충분히 만족할 수 없으며 소유로 인한 만족은 그 생명력이 짧고 후에 필연적으로 공허함을 불러 일으킨다고 말한다. 이 공허함은 마치 원자폭탄이 폭발로 인해 주위의 공기를 모두 연소한 후에 만드는 진공상태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소유의 결과가 단순히 행복, 불행처럼 주관적인 감정상태라면(실제로는 착각에 불과할지라도) 지금까지 걸어온 이 길을 계속해서 고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가 생명의 상실, 즉 멸종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프롬이 제시하는 것이 인간본래의 성격으로의 귀환, 존재로의 복귀이다.
프롬의 주장이 마르크스의 그것과 상당부분 닮아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프롬도 존재지향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고 그중에서도 특히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 프롬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자주 인용하고 있으며 마르크스를 정신적인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프롬은 마르크스 사상의 몇가지 결함을 지적하면서 현대에 맞는 새롭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프롬의 대안이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프롬의 대안이 시도된 적도 없을 뿐더러 이 책이 출간된지도 거의 30년이 되었고 그 사이 세계는 급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프롬의 대안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책을 읽는 내내 30년이란 시간의 간극을 거의 느낄수 없었고 오히려 프롬의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에 거듭 탄복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 사회가 과거보다 훨씬 소유지향적이 되었음을 감안한다면 프롬의 주장은 오늘날에 더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