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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04-05-25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좋은 정보네요... 퍼가도 되겠지요? ^-^;;
 
 전출처 : 갈대 > [퍼온글] [행복한 블로깅을 위한 5가지 조언 - 김중태]

 1. 블로그 사이트를 위해서 블로깅 하지 마세요. 여러분을 위해 블로깅을 하세요.


블로그 사이트를 알차게 꾸미고 채우려 하지 마세요. 좋은 정보를 많이 채우면 사람들이 좀더 많이 오겠지만 블로그를 꾸미기 위해서 블로깅을 하는 것은 지치고 힘든 일이 될 겁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저기서 펌질을 해서 이 블로그를 채우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글을 썼나 하는 후회가 들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블로깅을 하세요. 좋은 글을 자주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남을 위해 글을 쓰고, 남을 위해 퍼올 필요는 없습니다. 쓰고 싶을 때 조금씩 기록을 남겨두기 바랍니다. 내가 읽어야 할 좋은 글이라 생각할 때 퍼두기 바랍니다. 이렇게 자신을 위해 쌓인 기록은 먼 훗날 여러분에게 과거의 기억과 추억을 돌려줄 겁니다. 자신을 위해 퍼온 글은 여러분에게 풍부한 지식과 세계관을 제공할 겁니다.

 

2. 오래 운영하도록 하세요. 많은 기록보다 꾸준하고 오래 된 기록이 가치 있습니다.


몇 달 동안 수 백 개의 글을 올리다 그만 두는 것보다 조금씩 올리더라도 5년 10년 동안 꾸준하게 기록된 기록이 가치 있습니다. 글쓰기가 멈추는 순간 기록도 멈춥니다. 그렇지만 꾸준한 글쓰기는 꾸준한 기록으로 남겨지고, 5년이나 10년 후에 그 기록을 보면서 옛 기억을 더듬을 수 있을 겁니다.
며칠에 한 편씩 쓰는 느린 속도로 글을 쓰더라도 일 년이면 백 개, 십 년이면 천 개의 글이 쌓입니다. 이것은 몇 달 동안 쓰고 멈춘 천 개의 글보다 가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록의 단절이 없는 천 개의 글이니까요.

처음 시작 후 한 번에 열정을 다 쏟지 말고 힘을 비축하세요. 그래서 조금씩 천천히 오래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잡기 바랍니다.

3. 조급하게 채우려 하지 마세요. 블로그는 바삐 채우는 곳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쌓이는 곳입니다.


자기 블로그의 자료가 없다고 이것저것 가져와 채우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이 블로그를 그만 두지 않는 이상 블로그의 기록은 점차 쌓일 겁니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여유 있게 블로그를 운영하세요. 그것이 블로깅의 즐거움을 줄 겁니다.

[김중태문화원]을 오래 지켜본 분은 알겠지만 처음부터 [김중태문화원]의 자료가 지금처럼 많았던 것은 아닙니다. 한 달에 몇 개씩 올리기를 몇 년 하다 보니 지금처럼 쌓인 것이랍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조금씩 더 쌓이겠죠.

4. 싸우지 마세요. 마음에 드는 사람 좋은 사람만 만나세요.


덧글에 대뜸 욕설이나 반말을 올리는 사람이 있죠. 마음 상할 필요 없습니다. 별 웃긴 짬뽕이라 허허 웃고 신경 딱 끊고 대꾸 하지 마세요. 근묵자흑이요 근주자적입니다.(부처 눈에는 부처만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죠.) 쓰레기 덧글은 신경 쓰지 말고 여러분의 친구하고만 이야기 하세요. 마음에 드는 분의 덧글에만 답해주고, 마음에 드는 사람의 블로그만 찾아다니세요.
자신하고 의견이 다른 블로그 사이트에 가서 핏대 올리면서 싸우지 마세요. 서로 상처만 입습니다. 그쪽은 그렇게 살라 하고 여러분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세요.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기도 부족한 것이 인생 아니던가요. 좋아하는 블로그, 좋은 글만 보기에도 바쁠 겁니다. 구태여 엉뚱한 사람 상대하느라 정력 낭비 마세요. 마음에 안드는 사람과 글은 무시하는 것이 가장 좋답니다.

5. 새로운 것을 바라지 마세요. 부족함으로 블로깅의 즐거움을 쌓고, 이미 만난 인연으로 행복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블로그 도구를 사용하면서 새로운 기능을 많이 원하죠? 그건 욕심입니다. 지금 사용하는 도구의 기능을 몇 퍼센트나 활용하는가 돌아보기 바랍니다. 아래아한글, 엑셀, 아웃룩, 무버블타입(MT)의 기능 중에서 활용 못하는 것이 더 많을 겁니다. 부족한 것을 계기로 공부의 계기를 삼기 바랍니다. MT 기능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고 불만 갖지 마세요. MT 기능 추가만 바라보지 말고 HTML이나 CSS, MT템플릿 태그 공부의 계기로 삼기 바랍니다.
돌이켜보면 10년 전의 엑셀과 아래아한글로도 모든 사무 처리를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무실 업무 내용은 큰 차이 없고, 아직도 10년 전의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답니다. 새로운 기능을 바라기보다 있는 기능의 활용과 공부에 더 중점을 두기 바랍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블로그 사이트와 글을 찾아다니지도 마세요. 여러분 옆에는 이미 만난 인연이 있습니다. 눈길 따라 발길 따라 닿는 곳이 있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면 모를까 이미 만난 인연을 유지하는데 신경 쓰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 24시간으로 일정합니다.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는 시간 만큼 이미 만난 인연에 대해서 소홀해지는 법이죠. 새로운 것만 찾다가 이미 만난 여러분의 소중한 인연과 멀어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바랍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싶은 말입니다. 뭐 꼭 블로그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PC통신 시절부터, 인터넷 초기 시절부터 주변에 드렸던 말입니다. 제가 PC통신 시절의 사설BBS부터 대형통신망의 동아리지기, 개인 홈페이지, 블로그를 거치면서 꾸준하게 컴퓨터통신을 할 수 있는 원동력도 저 다섯 가지 기준에 맞추어 여유를 가지고 일을 진행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십 수년 통신 경험으로 드리는 말씀이니 여러분의 블로깅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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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갈대 > '귀찮아서', '태양 때문에'

 

 

 

 

 

 

뫼르소는 『적과 흑』 의 쥘리앵 소렐, 『호밀밭의 파수꾼』 의 홀든 콜필드와 더불어 소설뿐 아니라 영화계까지 뭇 후배들을 열광시키며 가장 많이 벤치마킹된 캐릭터 중 하나일 것이다. 단골 식당 집 주인 셀레스트의 말마따나 `무의미한' 말은 하지 않으며, 건조하며, 흥분하지 않는. 하지만 뫼르소의 수많은 후예, 특히, 1990년을 전후해서부터 한국에서 쏟아져 나온 그들 중에 뫼르소의 적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만한 캐릭터를 찾기는 어렵다. 시대 유감. 심드렁함, 질척거리지 않음, 성마른 냉소, 설혹 이 정도라도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한들, 뫼르소라는 캐릭터가 지닌 광맥의 복잡함에서는 석탄 한 줌 파내는 것 정도밖에는 안 될 것이다.

`엄마'의 장례를 치른 그 주의 일요일, 뫼르소는 아침부터 온종일 아파트 창문 밖으로 일어나는 풍경을 바라본다. 뫼르소의 삶 자체가 일요일의 오후 같다. 일요일 오후라는 말에서 거칠게 추출되는 나른함이나 더 나아가 권태는 삶의 다른 한 면이 지닌 진실이다. 인간의 사회가 만든 집단적 제의와 유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단호함은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만든다.

까뮈는 서문에서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라고 말했다. 사회의 제의와 유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다. 뫼르소는 “삶을 간단하게 하기 위한 거짓말을 거부”했으며, 그 무의미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방인』은, 관계와 세상에 대한 냉소와 가벼움을 피력하며, 사실은 너무 예민해서 상처 받기 쉽다고 인정 받으려는 소극성과 소심함의 진탕에서 질퍽대지 않는다. 거기에는 다만 묘사가 있을 뿐이다. 뫼르소, 어머니의 죽음, 마리와의 정사와 해수욕, 살인, 재판, 사형.

그러므로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귀찮아서'라는 말은 이제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관계의 질척거림이 귀찮아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기가 귀찮아서, 그것이 무의미해서 뫼르소는 모든 질문에 “그렇다”고, “태양 때문에”라고 대답한다. 그 순간 그는 근대의 경이적인 산물, 재판에서 소외된다. 재판은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그가 어머니의 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밀크 커피를 마시고, 울지 않았다는 사실, 장례식 다음 날 여자 친구와 해수욕을 하고, 정사를 나누고, 페르낭델의 희극 영화를 보러 갔다는 사실을 두고 논쟁하며, 그 `사실'에 사형 선고를 내린다.

까뮈는 뫼르소가 아랍 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태양 때문에”라고 대답하게 함으로써, 논쟁 거리를 제공하여 『이방인』을 많은 사람에게서 소외시켰다. 수많은 사람이 『이방인』 을 `읽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방인'을 두고 얘기하지만, 그 모든 사람이 `이방인'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이 재판정에 있던 사람들이 뫼르소를 대한 것처럼 『이방인』 을 대했다. 까뮈는 부조리를, 사람들은 부도덕과 편견을 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까뮈는, 그렇게 되길 원하진 않았겠지만, 그렇게 될 줄 안 결과를 통제한 셈이며, 그 `통제'의 숙명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우리 자리가 아니잖아.”라는 선고가 내려지면, 그 자리에 앉은 젊은이는, 임신을 했건, 39도의 열에 시달리고 있건, 실연의 고통으로 서 있을 수조차 없건, 거기에 앉는 게 무슨 상관이냐 생각하건 모조리 이방인이다.

 

`이방인'이라는 개념 자체는 타인을 전제로 한다. 이방인 뫼르소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에게는 이방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 속에 타인을 만들며 자신을 소외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타인에게 더 격렬한 소외를 돌려 받을지라도 자신에게는 소외당하지 않는다.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데, 남을 소외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태양은 지상의 모든 것에 그림자를 만들지만 그 자신의 주위에는 그늘을 드리우지 않는다. 까뮈는 자아와 의식 사이의 거리가 없는 이 인물을 만들면서 근대 이후의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감옥에 갇힌 뫼르소는 물 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마리 때문에, 담배 때문에 괴롭다. 그러나 고통은 지루함 없이 시간을 지탱하게 해주기도 한다. 금연 초기에는 담배를 피울 때보다 담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피하거나, 굳이 적응하려 들지 않아도 바깥 세상의 기억에서 오는 고통은, 완벽을 기할 정도로 그 세부를 샅샅이 들여다보다 보면 곧 익숙해지고 말아서 갇혀 있음은 더 이상 징벌이 되지 못한다. 그는 “바깥 세상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산 사람이면 감옥에서 백년쯤은 어렵지 않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징벌에 의연함, 징벌로 자신의 자유를 쉽게 빼앗기지 않음도 신화의 영웅이 지니는 모습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살아 있었던 뫼르소는 기도를 해주겠다는 사제에게 외친다. “......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올만한 가치도 없어.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너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또 옳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너도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생애 전체에 걸쳐,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쳐서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더불어 너처럼 나의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을 가지고 있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선고 받을 것이다. 너 역시 사형을 선고 받을 것이다. 네가 살인범으로 고발되었으면서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게 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까뮈는 자신의 인물로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를 그려보려고”했다. 너무도 분명하게 살아 있는 뫼르소는 이제 자신이 선택한 것과 다름 없는 죽음 앞에서 살아 볼 마음이 내켰고, 계단을 올라간 곳이 아닌 그저 평지에 있는, 자신의 목을 자를 단두대 앞으로 수많은 사람이 “증오의 함성”으로 모여주길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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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다 할 재능도 없고 이룩해야만 할 사명도 없으며, 반드시 전달하지 않으면 안될 감정도 없다. 나는 가진 것도 없으며 무엇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무언가 보상을 바라고 있다.” - 앙리 바르뷔스 『지옥』에서

『아웃사이더』에서 세상의 다양한 `이방인'을 한데 묶었던 콜린 윌슨은 『지옥』의 주인공 `그'를 『이방인』의 `뫼르소'와 더불어 진정한 `이국자(outsider)'의 전형으로 평가한다. 1942년 발표된 『이방인』은 출간되는 즉시 `종전후 최대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문단은 물론 광범위한 지식인 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까뮈에게 문학적 성공을 약속해 준다. 사르트르는 『이방인』 의 해설을 통해 “다만 제시될 뿐, 원래가 정당화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인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애쓰지 않는” 뫼르소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선과 악, 허락과 금지를 가르쳐주는 목사가 도착하기 전 서머세트 모옴의 원주민들의 순진함”이 죄가 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이방인』은 이 시대의 문예창작 가운데서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이방인으로 남는다. 까뮈는 그보다 몇 개월 후에 출간한 작품 『시지프 신화』에서 자기 작품에 대한 정확한 주석을 제공한다. “세계는 완전히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그토록 불합리적이지도 않”음을 지적하면서.

 

출저 : http://bookian.yes24.com/20010401/review6.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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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갈대 > [퍼온글] Dawkins vs. Gould: 절묘한 화해의 손짓.

 

 

 

 

 

 

인간의 지능에 관해 진화론적 설명을 제시하려면 우리는 두 사람의 사상가를 반드시 지나야 한다. 아니 두 사람의 사상가라기보다는 두 조류의 사상을 만나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 둘은 지능으로부터 시작해서 언어, 도덕, 음악과 미술, 건축에 이르기까지 인간 고유의 것으로 알려진 '문화 (culture)'와, 인간이 동물임으로 인해 자연스레 짊어지게 된 굴레로서의 '유전(gene)' 둘 사이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취한다.

두 사상의 한쪽 편엔 리쳐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을 비롯한 다윈의 나라 영국전통의 적응주의자들이 포진하고, 그 반대편엔 스테판 제이 굴드, 리쳐드 르원틴, 노엄 촘스키 등이 포진하고 있다. 도킨스일당 (Dawkinsian)과 굴드일당(Gouldian)사이의 혈전은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 (원제 Dawkins vs. Gould)>를 통해 접할 수 있으므로 그 설명은 생략하고 언어에 관해 대립하고 있는 둘을 간략히 소개해보자.

언어학의 아버지 촘스키는 언어의 기원, 아니 언어를 가능하게 한 우리 뇌의 진화를 우연으로 본다. 진화를 단속평형과 대멸종이라는 현상으로 깊은 시간(Deep Time: 스테판 제이 굴드가 인류의 제4혁명이라고 부르는 고생물학의 깊은 시간의 발견을 의미한다) 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굴드 역시 두뇌의 진화를 일종의 우연으로 파악한다. 촘스키나 굴드에게 있어 언어나 미술 음악 등의 인간이 가진 경이적인 '재주'는 우연히 커진 두뇌가 만들어 낸 부산물 (byproduct)이다.

그러나 스티븐 핑커를 위시한 일련의 진화심리학자들에게 있어 (사실 진화심리학을 범적응주의 (Panadaptation)이라고 공격한 것도 굴드다. 분명 구대륙과 신대륙을 무대로 펼쳐지고 있는 이 미묘한 사상사적 대립은 문화적 연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나 자신 아직 정확한 분석을 시도해 본적은 없으나 이 두 조류에 관한 문화사적 분석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우리 두뇌에 불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두뇌는 인류의 조상이 홍적세를 거치며 적응해 온 산물이며, 언어 또한 그 존재가 주는 이익으로 인해 선택된 적응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핑커에게 있어 언어가 단순히 커진 두뇌에서 나타나는 부산물일 수는 없다. 핑커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 <언어본능 (원제: The Language Instinct)>를 통해 철저히 분석하고 있다. 언어에 관해서라면 굴드나 촘스키는 사실 이미 핑커에게 무릎을 꿇었다. 언어는 진화의 산물이며 적응주의로 매우 훌륭하게 설명되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진 다른 특성들은 어떠한가? 도덕, 음악, 미술, 그리고 지능에 관해서 도킨시안과 굴디안은 과연 어떤 대립을 펼치게 될까? 도킨스주의자들에게 당연히 그러한 형질들은 자연선택된, 자세히 풀어 설명하자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선택되어 유전된 것이다. 그리고 굴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적응주의적 관점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연적 설명이 끼어들어갈 틈을 노린다. 굴드에게 음악이나 미술은 그리고 지능까지도 (굴드의 지능에 관한 생각은 최근 번역되어 널리 읽힌 <인간에 대한 오해(원제 :The Mismeasure of Man)>에서 읽을 수 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굴드는 지능의 특성을 유연함, 즉 plasticity로 본다. 굴드에게 있어 지능이란 서열화될 수 없는 자유로움인 것이다. 그의 이러한 우연에 대한 강조는 때때로 과장되고 비과학적인 설명으로 나아갈 때도 있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들 모두를 감내하고도 굴드의 휴머니즘에서 배울만한 것이 많다) 두뇌의 부산물로 파악된다.

도대체 이들은 왜 싸울까? 영국식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의 전승일까? 아니면 영국식 자유주의자들과 미국식 사회주의자들의, 즉 요즘 남남분열이라 흔히 말하는 보수 대 진보 간의 대립일까? 굴드가 "민중을 위한 과학"이라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의 절친한 동료 르원틴이 그 단체의 주요인사였다는 것과, 도킨스와 그의 추종자들 (예를 들어 <이타적 유전자 (원제: Origin of Virtue)>의 저자 매트 리들리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자다. 그가 <회의적 환경주의자 (원제:The Skeptical Environmentalist)>의 저자 비예른 롬보그를 지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설명의 단초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다윈이라는 걸출한 영웅을 가진 영국식 진화론과 다윈을 가지지 못한 미국식 진화론의 대립일까? 하지만 내 눈에 다윈은 그 두 사상을 모두 포괄하는 지적 영웅이다. 둘간의 대립은 결코 화해될 수 없는 깊은 그 무엇이 아니다.

다윈의 위대한 두 저서 <종의 기원>과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 이 두 저서를 가지고 이 두 사상사적 조류를 가늠해 볼 수도 있다. 물론 단순화된 비유다. 두 저서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도킨스던 굴드던 <종의 기원>은 그들의 바이블이니까.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다윈의 후기 저작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이 그 둘간의 화해를 -적어도 인간의 특성에 관한 대립에 있어서만은- 시도할 단초를 제공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보기에 <메이팅 마인드>는 그러한 화해의 첫걸음이다. 물론 제프리 밀러는 진화심리학자이며 적응주의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성선택은 생존을 담보로 한 전쟁적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놀이와 같은 이미지를 제공한다. 보기에 따라 성선택으로 설명되는 두뇌의 진화는 적응이기도 하며 우연이기도 한 것이다. 도킨스와 굴드 양자 사이에서 "생존"이라는 전투적 이미지를 제거하고 나면 둘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며, 이러한 제거의 빈 공간에 우리는 얼마든지 성선택을 끼어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과학적 사실들이 모두 참인 것은 아니다. 과학이란 절대적인 그 무엇은 아니며 더욱 합리적인 설명이 제시될 때 기존의 이론은 과감히 물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현재 인간의 특성을 설명해 주는 최고의 이론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도킨스의 말대로이다. 내 눈에 제프리 밀러가 제공하는 설명은 완벽해 보이며, 그것은 도킨스와 굴드의 화해를 위한 첫걸음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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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갈대 > [퍼온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제3의 시선들

 

 

 

 

 

 

표지 그림을 보고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었다. 나선형의 계단, 숨죽인 고요, 흰색 담벼락의 공포, 창으로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 길게 내쉬는 한숨. 무릎으로 머리를 깍지 끼고 앞뒤로 흔들다 보니 2000년 겨울의 덕수궁이 떠올랐다. 그때 덕수궁은 오르세 미술관 인상파 화가 전시회로 분주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고 싶었던 나는 하얀 입김을 뿌리며 언 발을 종종거리며 덕수궁으로 향했다. 미술관임에도 매표구부터 길게 늘어선 행렬이 전시관 안까지 이어졌다. 타인의 몸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질 정도로 밭은 공간을 이동하며 별이 빛나는 밤을 찾았지만 끝내 볼 수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느슨하게 계단을 밟았다.

2층은 1층과 비교해 무척이나 한산했지만 공간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그곳을 꽉 메우고 있던 기괴함은 참으로 공포스러웠다. 고야의 작품 백 여점이 주제별로 전시되고 있었는데 <타인의 고통> 표지 그림도 그 중 하나였다. 고야의 판화 ‘전쟁의 참화’ 시리즈는 인간의 잔악성을 극대화시키고 짐승처럼 도살된 무참한 죽음과 그것을 즐기는 도착적인 광기를 부상시킴으로써 혐오와 구토를 자아냈다. 발을 떼기가 겁이 날 정도로 공격적이고 포악했다. 나는 서둘러 문을 빠져나오며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하늘이 유난히 맑고 유연한 날이었다. 고야의 충격적인 이미지들은 겨울의 냉기 사이로 빠르게 흩어졌다. 이렇듯 타인의 고통은 한시적인 충격은 유발할 지언정 영원을 구가하지는 않는다.

수잔 손택은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한다.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스펙터클한 현대를 사는 이들에게 타인이 겪는 고통과 불행(손택은 주로 전쟁에 초점을 맞춘다)은 연민과 분개심을 자극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내재화하여 고통에 참가시키지는 못한다. 폐허의 먼지 속에서 살점이 너덜거리는 손가락 하나가 기어 나와도, 포탄과 함께 하늘을 나는 남자의 가슴에서 커다란 구멍을 발견하여도, 사지가 절단되어 몸통만으로 걷는 아이가 배시시 웃고 있어도, 우리는 욕을 퍼부어대며 채널을 돌리거나 인상을 찡그리며 가족과의 오붓한 저녁 식사에 열중한다. 마찬가지로 기아체험은 하나의 이벤트이자 개인의 성과물일 뿐, 고통을 분담하려는 의지는 아니다.

사진은 실제보다 사물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어야 하고 사진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야 하므로 보다 더 충격적인 이미지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최초의 자극은 점차 엷어지고 충격에도 익숙해진다. 더불어 충격적인 이미지가 주는 이런 고통은 이곳이 아닌, 바로 ‘그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는 믿음과 함께 안도감마저 심어준다. 나아가 이러한 안도감은 개인의 은밀한 관음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을 착취하여 희열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수반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분명 사진은, 작가의 상상력이나 주관이 확고하게 개입되는 그림에 비해 객관적이고 실체적이며 역사적이다. 그러나 사진도 조작은 가능하다. 그것이 카메라로 잡기 이전의 연출이든, 인화나 전시 과정에서의 조작이든 간에 작가 자신이나 영향력 있는 힘의 필요에 따라 조작되고 교묘히 이용되기도 한다. 손택은 미국에 흑인 노예사 박물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미국인들이라면 히로시마와 베트남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을 보려는 행위를 병적인 것이라 간주할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미국인들은 ‘국민을 격분시켜 당국에 맞서게 만들 위험이 조금도 없는’, ‘미국이 개입되지 않는 곳에서 행해진 악을 사진으로 찍기를 더 좋아한다’라고 지적한다. 그것이 어떠한 매체이든 힘의 원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손택 특유의 통찰력과 깊고 편안한 문체, 당당한 지성이 아름답다. 게다가 문학과 사진, 전쟁의 영역과 역사를 종횡으로 넘나드는 지력은 놀랍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보다는 온몸으로 끌어안으려 한 그녀의 용기와 실천은,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들로부터 귀감을 사 마땅하다.

서점에서 이 책을 고르며 L이 말했다. 교수가 타인의 고통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슨 글을 쓰느냐면서 이 책을 추천했노라고. 난 사실 조금 웃겼다. 그 교수가 했다는 말은 마치, 이 책을 통독하기만 하면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고 체화시키는 현목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으스대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교수가 했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쳐도 그것은 지식인들의 비굴한 자기만족이거나 우월감일 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의 텍스트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오만인가. 짧은 문장 하나면 충분했다. 저자의 통찰력을 눈 여겨 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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