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한 사람이 살던 공간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비우는 일은, 이사를 하는 일과는 전혀 달랐다. 그건 장례식보다도 더욱 구체적으로, 더욱 생생하게. 한 사람의 일생을 추모하는 일이라고 마리즈는 생각했다.p.021살아있는 사람을 떠올릴 때는 특별한 장면들이 기억에 남지만, 사별한 누군가를 다시 기억할 때는 특별한 장면보다도 가장 평범했던 일이 더 그리워지기도 한다. p.159대체 나의 조국은 무엇인가? 그 실체는 무엇인가? 조선인가? 대한 제국인가? 임시 정부인가? 분단된 한반도, 남한 혹은 북한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똑같이 독재자가 통치하고 있는 둘 중 어느 쪽인가? 자문은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p.234인간의 탐욕으로 시작된 제 ㅣ차 세계대전.유럽의 서부 전선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선 중 하나였던 프랑스 쉬이프.2002년의 김현우가 이곳을 찾게 된 이유는 강변을 걷던 중 고서적상의 진열대에서 우연히 눈에 띈 '서영해 져'라는 옛 한글로 쓴 저자명이 있는 <거울,불행의 원인>이라는 한권의 책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1920년 쉬이프에는 일본의 압제를 받는 답답한 고국의 현실을 벗어나 학업을 목적으로 떠나온 학생 해용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곳을 복구하기 위한 노동자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는데.. 수습된 시신들을 매장하고 그곳에 세워진 하얀 나무 십자가들이 숲을 이루게 된다.큰 틀로는 과거의 해용과 현재의 현우의 이야기로 교차진행되는 방식인데..과거 프랑스에 와서 일을 하던 한국인들을 찾던 현우가 결국 해용의 자녀들과 연락이 닿게 되고..결국에는 그들의 인연이 이어지게 되어있음을 보여주는데...제목을 보고 처음부분만 읽었을때는 이런 내용의 소설일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지금까지 읽었던 일제시대를 다룬 소설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의이야기를 다룬 소설들과는 너무 다른 느낌의 소설이라서...독특했다고 해야할까..역사적 사실을 다룬 책이 아니라서 스위스 은행에 숨겨진 비자금 같은내용도 너무 재미있었고..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정해용이라는 평범한 한 사람이 나라의 비자금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 이지만..한 나라의 국민이었다가 그 나라가 사라지고 광복을 맞았다가 다시 분열되고 그런 모습들을 다른 나라의 여권을 가지고서 지켜봐야했던...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마음이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야만했던 정해용이라는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해볼수 있었다.결국 정해용이 수숩해서 묻힌 하얀 십자가 밑의 수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전쟁 때문에 죽음을 당해야만 했는데..그게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지...표지에 있는 묘지 사진이 아프게 다가왔다.#하얀십자가의숲 #길혜연 #공중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