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주름에는 스토리가 있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안나 마시니 그림, 황유진 옮김 / 샘터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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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잡은 할아버지의 손은 나의 손과 달랐다. 굳은살 밴 투박하고 거친 손바닥과 오글오글 주름 져 있던 손등.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누워계시던 할아버지는 일어나 앉아 우리를 반기는 대신 거친 손을 내미셨다.

몇 달 후,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장례식장에서 다시 한 번 할아버지의 손을 맞잡았다. 깨끗한 수의를 입고 단정하게 누워계시던 모습. 맞잡은 손은 차가웠고 그랬기에 할아버지의 손등에 난 주름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할아버지를 보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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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현대문학의 거장인 다비드 그로스만이 쓴 <모든 주름에는 스토리가 있다>는 손자와 질문으로 시작되는 동화이다. "할아버지, 얼굴에 있는 주름은 어쩌다 생긴 거예요?" 나이 듦에 따라 자연스레 생기는 주름을 보고 어쩌다가 생겼나고 묻는 아이의 해맑은 질문에 할아버지는 웃으며 주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주름은 나이가 들어 생기지. 또 어떤 주름은 사는 동안 일어나는 온갖 일 때문에 생긴단다. 행복한 일과 슬픈 일 때문에 말이다."

"이건 분명 내 주름이에요."
요탐이 속삭였지요.
"어떻게 아니?"
"주름이 둥글잖아요. 그리고 저는 둥근 피자를 제일 좋아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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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내 손을 잡아주던 할아버지의 손에도, 나와 언니를 키운 엄마와 아빠의 얼굴에도 주름이 있다. 이젠 팽팽함 보단 주름에 가까워지는 얼굴들, 그러한 나이들. 암논 할아버지의 말처럼 주름은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의 사정으로 생기고 덧대어진다.

한 생애가 피고 지기까지, 그 세월은 실로 짧지 않다. 인간이 가진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것도 아니어서 언젠가는 상처가 나고 다치고 흠집이 생긴다. 주름도 어쩌면 하나의 상처 혹은 흠집일지도 모른다. 열심히 삶을 살았다는 삶의 흔적일지도 모르고. 스물넷의 내 얼굴에도 잔주름은 있겠지. 내년이면 올해와 또 다를 것이고 십 년 후면 큰 주름 하나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내 몸, 내 손, 내 얼굴에 또 어떤 주름이 생길까. 그러는 사이 나의 삶엔 어떤 일이 벌어지고 펼쳐질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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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게 - 내성적이고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 수업
정교영 지음 / 샘터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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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성격은 다양하다. 생김새 역시 다양하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그것들을 크게 보면 조금씩 무리가 지어지고 '성향'이 나타난다. A보단 B를 좋아하는 집단, 나서기보단 물러나서 지켜보길 좋아하는 집단, 외향적이기 보단 내향적인 집단처럼.

내가 어릴 적 친구들은 혈액형을 물어봤다. "너 A형이지?" 친구들의 물음과 달리 내 혈액형은 B형이었고 아이들은 크게 놀라며 "네가?" 했다. 아이들이 내게 혈액형을 물어본 데에는 내 피를 알고 싶어서라기 보단 그 속에 담긴 성격적인 특성을 파악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내향적인 성격 탓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나는 나를 향한 그런 재단에 일찌감치 지쳐버렸고, 몇 해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MBTI 검사 결과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모두 다른 개인을 몇 가지 문항 만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에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결과로 인해 찍힐 낙인이 더 싫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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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게>는 '내성적이고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 수업'이다.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내향적인 성격 탓에 받은 오해와 편견, 고충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넘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시작한다.

p.77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향성과 외향성을 연결하는 지점, 중간 어디쯤 속해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극단적인 내향인과 극단적인 외향인은 흔하지 않다. 또한 한 사람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할 때 외향성/내향성 특성뿐만 아니라 나머지 네 가지 요인(개방성, 성실성, 우호성, 신경과민성)들을 함께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p.141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다. 남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이해하고 배려하듯이 나 자신에게도 그러해야 한다. 그러려면 나를 지킬 수 있는 '선'을 명확히 알고, 단호하게 선 긋기를 실천해보자.

p. 175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주목받고, 오해받고, 지적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든 큰 상처이다. 다 뜯어보면 모든 인간은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더 많다.

p.188 일주일이 됐든, 하루가 됐든, 아니 하루 5분의 시간이라도 깊은 숨을 내쉬고, 다시 길게 들이쉴 수 있도록 내 안의 텅 빈 공간, 지루한 공간을 허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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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외향인보다는 내향인에, 그들이 삶을 살아가며 겪은 어려움과 그에 대한 해결 방안 혹은 약간의 도움을 이야기 한다. 어릴 때에 비해선 많이 친화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나 여전히 내향적인 나는 책 속에 소개된 내향인들의 삶에 쉽게 이입할 수 있었다. 거절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과 낯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저절로 구석을 찾는 모습 등. 책 곳곳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경우엔 나이가 들며, 또 주변 사람들로부터 '괜찮음'을 여러 번 겪으며 사회적 혹은 사색적 내향인이 되었지만 가끔씩 마음이 작아지는 날엔 아주 소심한 내가 다시 나타나곤 한다.

인간의 뇌는 열에 의해 모양이 잘 변하는 플라스틱처럼 상황에 따라 적응하고 변하는 가소성이 있다(뇌가소성). 그렇기에 주변 상황이나 본인의 의지로 충분히 성격을 바꿀 수 있다. 주변에 나와 맞는 사람을 두고 그들을 통해 괜찮음을 경험하며 스스로도 한 발짝 나아가는 일. 그런 하루를 계속해서 쌓아나가면 언젠가는 외향인도, 내향인도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

책을 읽으며 조금 아쉬웠던 점은, 외향인보다는 내향인을 위한 책이다보니 '외향인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완벽주의를 설명하는 부분에선 '완벽주의가 내향인에게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일까?' 라는 물음이 들었다. 또한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게'라는 말 속에 '내향인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공식이나 편견이 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반대로 '외향인은 곧 혼자를 못 견디는 사람'으로 읽히지 않을까도 싶었다.

그럼에도 나름의 결론을 내리자면, 우리 모두는 내향성과 외향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점. 그렇기에 한쪽으로 치우친 나를 미워할 필요가 없고 균형을 맞추면 된다는 점. 내향인이라고 마냥 어두운 것도 아니고 외향인이라고 마냥 밝은 것도 아니라는 점, 우리 안엔 어둠과 밝음이 모두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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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단 한 번 - 때론 아프게, 때론 불꽃같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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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어느새 서문과 1장을 지나있었다.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넘어가던 페이지. 그의 글엔 페이지를 술술 넘어가게 하는 힘과 동시에 쉽게 지나치지 못할 순간이 함께 있었다.

1장을 읽고 네이버에 '장영희'를 검색해보았다. 2009년 세상을 떠난, 큰 눈을 가진 중년의 여성. 소아마비로 평생 목발을 짚었으나 아버지를 따라 영문학을 전공하고 유학까지 다녀와 교수가 된 사람. 깡총한 앞머리와 어린아이 같은 얼굴. 그녀의 사진을 볼수록 그녀에게 마음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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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2 한 번 생겨난 사랑은 영원한 자리를 갖고 있다는데,

p.46 짝사랑이란 삶에 대한 강렬한 참여의 한 형태이다. 충만한 삶에는 뚜렷한 참여 의식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환희뿐만 아니라 고통 역시 수반하게 마련이다.

p.68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이 짧은 시간, 이 하나의 점 같은 공간이 우주인 줄 알고, 도대체 왜 날 건드리냐고, 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 조목조목 따지고 침 뱉고 돌아서려던 나의 개미 마음이 부끄럽다.

p.89 까짓, 영어의 p와 f 발음쯤 혼동하면 어떤가. 영어는 기껏해야 지구상의 1/3 정도 인구가 알아듣는 말이지만, 불쌍한 노인을 보고 측은하게 느끼고 도와주는 마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야말로 A+ 마음 아닌가. (⭐️)


영문학을 전공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지만,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목발 짚는 장애인이기도 한 그. 태생이 눈치가 없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이지만 그 역시 자신이 가진 장애로부터 받는 차별에 '어쩔 수 없음'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기보단 다른 방향을 찾고, 그의 아버지는 그런 그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p.191 "여보, 우리 영희는 문학 공부를 시켜야겠어. 이런 아이는 특수 학교 말고 일반 학교에 넣어 여러 아이들과 함께 경쟁시켜야 해. 더 큰 세상을 보야줘야 해. 그래서 크면 내 뒤를 잇게 해야지."

p.262 언제나 누구에게나 떳떳하고 당당하고 '미안하지' 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양심'과 성실함을 나는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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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 있다. 한국엔 장애인이 많지 않다고. 어떤 엄마는 소리친다. 장애인에게 탈시설은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장애인이기에 대학원에 입학할 수 없고 학교에 입학하기 어려웠던 장영희 교수와 지금의 장애인들. 어린 자식의 손을 놓을 수 없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부모와 모른 척 외면하는 사람들, 제도, 법. 그가 태어나 교수가 되기까지의 시간과 그가 떠난 후의 지금, 장애인들이 받은 대접은 얼마나 달라졌을까(혹은 그대로일까).

한 장 한 장 천천히, 가끔은 멈춰서 읽은 책. 슥슥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다시 돌아가 곱씹던 책, 문장들. 솔직하기에 여리고 어린 글, 그래서 더 내려 앉는 글. 무거우면서도 기쁜 마음이, 그러다가도 묵직한 마음이 느리게 온다.

🌿✨🌿✨🌿

가장 좋았던 만국공통어에 관한 글. 결국 우리는 언어가 아닌 눈빛과 손짓으로, 마음으로 통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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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도배사 이야기 - 까마득한 벽 앞에서 버티며 성장한 시간들 에디션L 3
배윤슬 지음 / 궁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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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도배사 이야기>는 청년 도배사인 저자의 에세이다. 연세대학교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그가 노인복지관을 거쳐 도배사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도배사가 된 후의 일상이 담겨 있는 책. 화사한 분홍색 표지를 펼치면 푸릇푸릇한 녹색의 속지가 보이고, 두 색깔이 주는 싱그러움만큼이나 열정 넘치는 하루하루가 글에 녹아 있다.

p.46 '기술직'이란 말 그대로 몸으로 터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한 직업이기에 기술만 완전하게 연마했다면 여타 직업보다 안정적이라 할 수 있다. 긴 시간 익혀왔기 때문에 하루 이틀의 인수인계만으로 다른 사람이 내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 나는 그래서 이 일을 택했다. 기계 부품처럼 쉽게 대체되는 사람, 그래서 홀대 받는 입장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필요한 일을 하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일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보다 일터에서의 내 존재감이 더 중요했다.

p.64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도배사는 벽지를 잘 알고 능숙히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늘어나는 벽지, 뻣뻣해서 잘 늘어나지 않는 벽지, (중략) 단기간에는 힘들다. 여러 현장을 거쳐 많은 벽지를 만져보고 작업해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p.75 어깨너머로 보았을 때에는 그 하루의 하자 보는 시간이, 그 조금의 책임감이 결국 자신에 대한 평가가 되고 평가가 쌓여 관계성이 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p.125 누군가가 보기에는 모두 더러운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하는 '노가다'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니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는 것은 나의 한 가지 모습일 뿐이지 내 전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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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권 대학을 나와 안정적인 직장을 얻었으나 그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도배'로 방향을 튼 저자.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고 때론 성차별도 당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좋았다. 한국 사회에서 타인의 시선과 말을 견디기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인데 그걸 해내다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그는 개선이 필요한 문제도 잊지 않는다. 아파트 공사 현장에 여자 화장실이 없다거나 노동자를 위한 깨끗한 화장실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점, 남들이 노동자를 보고 '노가다'로 부른다고 해서 그들까지 스스로를 '노가다'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점 등을 짚고 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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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아빠가 떠올랐다.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목수로 삼십 년 가까이 일하는 아빠. 다른 아빠들과 달리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하는. 여름이면 살이 벌겋게 익다 못해 검게 타버리고, 겨울이면 발가락 동상 걸린 곳이 간지러운. 하지만 아빠는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직업을 부끄러워한 적 없다. 아빠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취업준비생이자 곧 졸업을 앞둔 대학교 사학년. 졸업을 미루기 위해, 취업 준비를 하기 위해 일 년 간 휴학을 했으나 돌아보면 뭘 했지 싶은 날들을 보낸 백수. 휴학 기간 중 8개월 간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며 회사 내의 불합리함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겪었던 알바생. 이런 내게 배윤슬 작가의 책은 깊에 와 닿는다. 하고 싶은 일 이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는 어느 날의 다짐. 잊었던 마음이 다시금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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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다섯 마리의 밤 - 제7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채영신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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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밤이 이어진다. 끊임없이 눈 내리고 미끄러운 날들. 다름과 받아들이지 못해 틀린 것이 되어버린 것들, 중심으로부터 밀리고 밀려 주변이 되었다가 소수가 되어버린 것들. 치유 받지 못하고 덮어놓은 상처가 되살아나는 밤들, 지지 않기 위해 이 악 무는 날들. 외로운 밤은 끝나지 않고 그 밤이 쌓인 삶은 다시 한 번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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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다섯 마리의 밤>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알비노인 세민과 세민의 엄마 박혜정. 세민과 동갑인 안빈과 안빈 엄마. 한때 친자매만큼이나 가까웠던 혜정과 안빈 엄마는 그들의 자식인 세민과 안빈을 이유로, 치유 하지 못한 상처와 타오르는 열등감을 이유로 멀어진다.

p.13 어른이 되어본 적 없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벌어지는 상처가 있는 것을 깨달을 만큼 나이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때론 어른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집요하다.

p.64-65 엄마도 알지? 천국을 바라보고 있는 곳, 거기거 지옥이란 거. (중략) 천국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 지옥이라면, 지옥을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 지옥마저 부러워서 참을 삼키며 바라봐야 하는 곳은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세민에겐 요한이 있다. 태권도 사범이자 장미(에스더)의 꿈이었고, 육손이이자 성별자였던, 그러나 두 아이를 상해한 살인범인 그. 세민과 요한 사이엔 '다름'이 있었고, 둘은 그것으로부터 오는 상처와 외로움, 견뎌야 할 것을 알아본다.

p.101 요한과 세민은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단 한 사람이었다. 이해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거라면 그건 이미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사이란 뜻이었다.

p.111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다 배제하고 보는 건 토끼의 슬픈 생존전략일지도 몰랐다. 아예 소리란 걸 내지 못하는 존재. 그래서 잡아먹히는 순간에까지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존재.

p.256 어쩌면 요한, 간절함에 배반 당하는 순간이 지옥이란 걸 알았기에 우리는 더 간절할 수밖에, 악착같이 간절함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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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혜정을 안타깝게 여기고 친동생처럼 대했던 안빈 엄마는 결국 혜정 대신 제 자식을 택한다. 세민을 잃은 혜정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그 끝은 알 수 없다. 성별자를 기다리며 휴거를 외치는 사람들. 보육원에서의 어느 날, 요한에게서 빛을 봤다는 에스더. 스스로가 가진 힘이 작아진다며 세민이야말로 성별자라고 말하던 요한. 육손이라 놀림 받았고 외로움을 견뎌야 했던 날들.

<개 다섯 마리의 밤> 속 주인공들은 모두 치유 하지 못한 상처를 안고 있다. 제 아들이 최고라 여기는 안빈 엄마의 내면엔 언니를 대신해 맏이 노릇했던 과거의 자신이 있었고, 아들은 아끼면서도 거리를 두고 때론 남처럼 여기는 혜정에겐 친족 간 성폭행이라는 아픔이 있다. 새하얀 피부와 붉은 눈을 가지고 태어난 세민은 존재 자체로 차별을 당하고, 그 자체가 곧 상처가 된다. 육손이로 태어난 요한과 보육원에서 자란 에스더 역시 외로움이라는 깊은 흉터를 안고 살아간다.

상처를 치유하지 못해 깊게 곪아버린 사람들. 살기 위해 스스로를 해치고 모른 척 덮어두는 사람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들, 너무도 간절하여 남들이 틀렸다고,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 그것들의 가장 아래엔 어떤 얼굴이, 어떤 상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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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과 적당히 떨어져 그들의 상처를 하나씩 보여주는 소설. 가까운 듯 먼 듯 멀찍이 서 있는 소설. 그렇지만 낫지 못한 상처가 너무도 선명한 소설. 그래서 아픈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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