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곤 사건을 둘러싼 일화들은 전체적으로 공산주의 세력의 상당한 강화를, 상대적으로 아나키스트 세력의 약화를 의미했다. 37년 7월. - P525
그들은 매일같이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며 하늘을 살핀다. 물길이 다시 열리고 수평 갱도를 따라 땅을 뚫고 나온 지하수가 복수에 몸서리치며 허기와 갈증을 단숨에 해소해주길 고대한다. 그토록 수많았던 속박과 열병이 한 차례 지나간 후, 어느 날 자유를 가져다 줄 그 물을 기다린다. - P23
"제일 그리운 건 준의 진지함이야. 그녀는 자기 인생을 하나의 과업으로 여기고 이해랄지 지혜랄지, 본인은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가치를 향해 제어하고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어. 사람들은 대부분 돈이나 경력, 자식 따위를 위해서 미래를 계획하지. 하지만 준은 뭐랄까, 자기 자신을, 존재를, 신의 창조물을 이해하고 싶어했어. 나는 그 여자의 머릿속에 든 헛소리는 싫었지만 그 진지함이 좋았어." - P133
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도 혼란에 빠졌다. 내가 본능적으로 존경했던 폴란드인들이 내가 가장 불신하는 서방 정치인들을 지지하도록 촉구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삐딱한 우익논객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었던 반공산주의의 언어가 이곳에서는 모두를 쉽게 현혹했다. 이곳에서 공산주의란 특권과 부패, 허가받은 폭력, 정신병이자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일련의거짓말이며, 가장 두드러지게는 외국 권력에 의한 점령의 도구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사회에서 단순하게 반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문장이지만 팔십년대 영국 지식인의 더 보편적으로는 정치적 견해가 혼란에 빠질 때의 심정이 느껴쟈서 좋았다. 제레미의 현재 입장이 있어서 안심되기도 하고ㅋ - P153
진정한, 정말로 진정한 장서광은 결국에는 자신의 책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개의치 않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장서를 돌볼 시간이 없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 장서광은 중독된 자들이다. 모든 중독이 그렇듯이, 책 중독도 끊임없이 복용량을 늘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책들이 책장 밖으로 넘쳐나고 바닥에 높이 쌓이고 빈 벽을 타고기어오른다. 마지막에는 책들 자체가 가구가 되고, 심지어 정말 마지막에는 소유주의 유일한 가구가 된다. - 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