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만큼 작품이 끊임없이 출간되는 작가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다작인 만큼 모든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개인적으로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이 좋았고, 최근에 읽었던 <매스커레이드 호텔>, <나미야 잡화점의 비밀>이 좋았는데 그 외 소설들은 그게 그거인 듯,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그랬었다. 그래도 작가의 네임밸류 덕분에 신간이 나오면 또 기대를 하면서 책을 찾게 된다.
이번에 읽은 <질풍론도>는 일단 3시간반 정도에 다 읽어냈다. 가독성은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답다. 스키장 어느 너도밤나무 아래 묻어놓은 생물병기를 찾기 위해 설산을 누비고 다니는 스키어들을 묘사하는 부분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다보니 긴박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헌데 긴박하다고 손에 땀이 쥐어지는 것 같았는데 뭔가 허전하다. 뭔가 빠졌다. 애초에 그 약통을 훔쳐나와 설산에 묻어놓고 대학측을 협박하던 범인이 어이없게 교통사고로 죽어버린 그 시점부터 이 소설은 갈 곳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몇장의 사진으로 설산이 어느 스키장인지 알아내고, 스키도 제대로 못 타는 연구원이 코스 밖에 있는 그 약통을 찾겠다고 무리하다가 만난 구조요원이 일도 팽개치고 사력을 다해 대신 약통을 찾으러 다니고.. 너무 억지설정에 중요한 뭔가가 빠져서 그냥 이야기만 둥둥 떠다니면서 술술 흘러가는 느낌이다.
책 두께가 좀 있는 편이지만 종이가 두껍고, 활자가 큰 편인지 실제로 소설의 양(?)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스키 관련 용어 설명은 대충 훑고 넘어가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어서 더 빨리 읽혀진다. 다 읽고 나면 허무해지는 설산의 추격전이 후반부까지 이어지다가 끝은 너무 성급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삶의 교훈을 몇마디 대사에서 친절하게 줄줄 설명해줄 땐 손발이 오그러들 정도.
그래도 한동안 미야베 미유키와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한다고 말했었는데 이젠 다른 작가로 대체해야할 것 같다. 누쿠이 도쿠로나 다카노 가즈아키, 우타노 쇼고 등 멋진 작가들이 많은데 굳이 히가시노 게이고를 이름값만으로 앞세우기에는 실망이 가득해서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