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타이어
이케이도 준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 소설에서 추리나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하면 대게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등을 떠올린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연히 발견한 <하늘을 나는 타이어>의 작가 이케이도 준은 일본에서 '금융미스터리'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고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도 숨겨져 있던 보물같은 작가가 되었다. 

아카마쓰운송의 사장 아카마쓰는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자기 회사의 한 트럭이 운행 중 타이어가 빠져나가 길을 걷던 모자를 덮쳐 어머니가 즉사했다는 것이다. 이 타이어는 무게가 140kg에 달한다. 트럭의 제조사인 호프자동차에서 트럭을 회수해서 조사를 하고 결론은 '정비불량'으로 나왔다. 하지만 정비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보통보다 훨씬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정비를 해왔으므로 아카마쓰는 그 결론을 납득할 수 없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호프자동차를 상대로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지만 대기업에서 동네 운송업체를 상대해줄리 만무하다. 그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데 피해자 가족은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화가 나서 아카마쓰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아들의 학교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들에게 도둑 누명을 씌우기까지 하는데...............

여기까지가 기본적인 줄거리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마쓰의 시점에서 풀어쓴 이야기이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주 많은 등장인물들 각각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해본다면 한가지 사실을 두고 여러가지 줄거리가 나올 수 있다. 그만큼 이 사건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하긴, 무슨 일이든 내가 보는 것이 다르고, 옆 사람이 보는 것이 다르니까. 

단순히 '정비불량'이라고 서둘러 결론을 내리고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걸 알아챈 호프자동차 고객전략과 과장 사와다는 마음이 맞는 동료와 내부적으로 사건을 조사하다가 회사의 '리콜 은폐'를 알아차린다. 호프자동차는 이미 3년 전에도 리콜을 은폐하려다 발각되어 소비자의 신용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 대기업 계열사이기에 아직 버티고 있지만 사실 그 때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 없었다. 사와다는 다시 한번 '리콜 은폐'가 만천하에 공개되면 다시는 회사가 일어설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내부고발을 하려 하지만 그것도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 -- 사와다는 처음 아카마쓰 사장을 상대할 때 거만한 대기업 과장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회사를 살리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내부고발을 단행한 점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그것이 억울한 중소기업과 피해자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의 권력구도를 바꿔보고자 한 욕심에 기인한 것이었으므로 뒤로 갈수록 그의 행동은 '정의'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호프자동차의 융자를 담당하고 있는 도쿄호프은행의 이자키 조사관. 실적은 점점 떨어지고 신용할 수도 없기에 호프자동차에 거액의 융자를 해 줄 수 없다고 판단하지만 같은 계열의 대기업이기에 온갖 압박을 받고 있다. 현장의 담당조사관의 판단이 융자심사의 큰 역할을 해야 하지만 사실 융자심사는 이성적인 판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도의 정치적인 전략과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자키는 훌륭하게도 끝까지 신념을 버리지 않고 융자보류를 주장한다. -- 소신있는 은행원이다. 하지만 실제로 은행이든 어디든 직장에서 윗선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릴 수 있는 직장인이 있을까? 결과적으로 잘 한 일이지만 과정적으로 그는 과연 조직에서 이쁨을 받을 수 있는 직원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런지 씁쓸한 감상이 생긴다. 그리고 이자키와는 다른 이야기이지만 은행에서 계속 주장하는 '컴플라이언스'라는 것. 도덕성의 저하를 우려해 범죄에 연루된(단순히 수사를 받은 것도 포함된다.) 기업에는 융자를 해 줄 수 없다며 아카마쓰운송을 무시한 은행이 마찬가지로 가택수색을 받은 호프자동차에 대해서는 컴플라이언스의 '컴'자도 들먹이지 않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기업의 리콜 은폐를 알아차리고 이를 보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간지 기자도 있다. 아카마쓰운송 뿐 아니라 여태까지 호프자동차의 트럭이 일으킨 사고를 두발로 뛰면서 조사해온 에노모토는 드디어 주간지에 기사를 실으려 하지만 일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호프계열의 회사들이 광고를 실어주지 않겠다며 압박이 들어오자 주간지의 윗선에서 기사 게재를 보류했기 때문이다. 에노모토는 주저앉고 만다. -- 과연 언론의 역할은 무엇일까? 요즘 현대 사회에서 언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될 일도 언론에서 떠들어버리면 물거품이 되고, 되서는 안 될 일도 언론 플레이를 잘 하면 얼렁뚱땅 해결된다. 하지만 그 언론마저도 돈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되면 밝고 맑고 명랑한 사회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호프자동차의 조사 결과 '정비불량'으로 결론이 나자 이를 바탕으로 아카마쓰운송을 가택수색를 하고 사장과 정비담당을 체포하기 위해 노력하던 경찰은 벽에 부닥치고 만다. 사실 아카마쓰운송은 '의외로' 정비도 상당히 잘 하고 있었고, 깨끗했기 때문이다. 피해자 가족에게는 진범을 잡아 그 억울함과 슬픔을 조금이나마 줄여드리겠다고 약속했으나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정비 불량이 아니라고 계속 주장하는 아카마쓰 사장의 외침은 파렴치하게 들릴 뿐이다. 그러다가 아카마쓰가 제시한 결정적인 자료를 보고는 수사의 관점을 아카마쓰운송이 아니라 호프자동차로 돌려 진지하게 수사하게 된다. -- 경찰의 역할은 무엇인가? 최근 영화 <아저씨>를 보았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그려진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억울하고 진실된 주인공의 말은 듣지도 않고 무조건 주인공을 잡아 '쳐넣으려는' 경찰이 무식하게 보인다. 주인공이 못된 무리들을 혼내주고 범죄의 온상을 발견해서 경찰에 알려주면 경찰이 뒤늦게 달려와 현장을 정리하는 식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주인공의 시점이 아닌 객관적인 시점으로 이야기를 바라보면 분명 '나쁜 놈'은 주인공이다. 모든 증거와 상황이 주인공을 범인으로 지목하니 경찰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처럼 이 소설에서도 대부분의 "증거"가 아카마쓰운송을 사건의 원인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니 경찰도 처음에는 아카마쓰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이 바로 그 "증거"가 호프자동차에서 조작해낸 조사결과보고서였던 것이다. 대기업의 연구실에서 제출한 보고서이니 그 진위를 확인할 조금의 생각도 없이 당연히 믿어버린 것이다. 물론 뒤에는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수사를 하긴 하지만. 

글이 많이 길어지고 있다. 사실 할 말은 엄청나게 더 많다. 한 명 한 명 꼬집어서 비판하고 칭찬할 등장인물이 훨씬 많은 것이다.
한가지 사실을 두고 여러 사람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흡입력이 대단하다. 책이 꽤 두꺼운 편이지만 한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쉽게 놓지 못한다. 다만 진실을 대략 알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여기저기에서 당하고 치이는 아카마쓰 사장의 입장에서 읽고 있기 때문에 감정이입을 해서 억울하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신나게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라 과연 언제 아카마쓰가 호프자동차에 한방 먹일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아카마쓰는 부도를 면하고 웃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읽을 수 밖에 없다. 그 억울함을 이겨내고 경제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다양한 집단의 내면이 궁금하다면 읽어보면 상당히 재밌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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