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5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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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누구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으로 고른 책을 즐겁게 읽고 스스럼없이 리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한동안 독서와 리뷰가 의무감으로 겨우겨우 해냈던 시간이 꽤 길게 있었는데 아주 좋은 변화이다. 백만년만에 가본 듯한 시립도서관에서 책들이 가지런히 꽂힌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온몸이 들썩들썩 거렸다. 일본소설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을 특히 좋아하는데, 솔직히 한 번 재밌게 읽고는 다시 손이 잘 가지 않아서 돈 주고 구입해서 읽기는 좀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찌나 작품이 많은지, 그걸 다 소장하기에는 벅차서 아예 손을 놓아버렸던 거였다. 그랬는데 도서관에 그 작가들의 책이 구석구석 숨어서 '나 여기 있지롱~'하며 깜짝 깜짝 놀래키는데,, 아휴, 그 기분이란.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낙원>. <모방범> 이후 9년의 시간이 지나서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 이야기. 진작부터 읽고 싶었는데 이번 여름 휴가에 다 읽어야지~ 하며 두 권을 동시에 빌렸는데, 글쎄 하루만에 두 권을 다 읽어버렸다. 역시 가독성 하나는 최고다. 누구도 그녀를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리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역시나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쉽게 술술 읽히면서도 다 읽고 나면 그 여운이 진하게 남아서 이렇게 글로 남겨놓지 않으면 마음에 계속 남아서 내가 불편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낙원> 속 등장인물인 어린 히토시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내지 않으면 머릿속을 빙빙 도는 그 영상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처럼.

 

<모방범> 속 사건인 연쇄유괴살인사건을 취재했던 프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는 그 사건의 충격으로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야 몸을 추스리고 작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며 지내고 있는데 그녀에게 어떤 사람 좋아보이는 부인이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자신의 아들이 그린 그림이 이상하다고. 그림솜씨가 아주 뛰어난 아들이 공책에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들은 마치 유치원생이 그린 것처럼 삐뚤빼뚤 엉망이긴 하지만, 아들의 머릿속을 빙빙 도는 영상을 그림으로 그려낸 거라고 한다. 그 중에는 마치 예지몽처럼 미리 예언이라도 하듯 나중에 밝혀지는 사건을 암시하는 그림들도 몇 장 있다. 그 중 아들이 죽기 전 그린 그림 한 장. 거기에는 박쥐모양풍향계가 달린 집에 회색빛깔의 한 소녀가 누워있다. 히토시는 그 소녀는 이 집을 벗어날 수 없어서 슬퍼한다고까지 얘기했다. 그 후 히토시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뉴스에 떠들석하게 나오는 사건이 있었다. 목조건물에 화재가 났는데 그 집 부부가 경찰에 자진출두하여 16년전에 자신들이 딸을 죽여서 마루 밑에 시체를 숨겨놓았다고 자백한 것이다. 실제로 마루 밑에는 시랍화된 소녀의 시신이 나왔다. 하지만 살인사건 공소시효 15년을 넘긴 터라 그 부부의 죄는 처벌받지 않았다. 과연 히토시는 이 사건을 어떻게 알고서 그림을 그린 걸까. 

시게코는 히토시가 어떤 능력이 있어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일들을 알고 있었던 건지 조사하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히토시가 그린 '산장'그림의 영향이 컸다. 이렇게 <낙원>에는 <모방범>속 사건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시게코가 9년 전 그 때 그 프리라이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9년이나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그 사실이 시게코의 조사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한다. <모방범>을 읽은 지 시간이 쫌 지나서인지 왜 이렇게 시게코가 죄인처럼 행동하는지 가물가물해서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크게 방해되는 것은 아니어서 쭉 읽었다. (이 글을 다 쓰고 <모방범>을 발췌독해봐야겠다.)

전형적인 불량소녀였던 아카네. 결국 부모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자기 집 마루 밑에 16년동안이나 숨겨지게 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이야기는 진행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카네가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고 그 부모는 그걸 참다참다 못해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사고였다' 는 식의 주위 사람들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아카네의 동생 세이코는 바깥으로부터 파괴당한 인생을 살고 있는 '밝고 아름다운' 아가씨(모순이다.)로서 불쌍하게만 보이고, 딸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점잖고 담담한' 신사 도이자키 겐의 심정에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이 사건의 뒤에 누가 있는지, 도대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쉬지 않고 책 페이지를 넘기며 끝까지 달려가며 읽었던 나는 책장을 덮을 때까지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카네의 마음을.
아카네가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나쁜 짓을 일삼은 것은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하지만 아무도 아카네가 왜 그러는지 그 마음을 제대로 들어보고 어루만져 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비뚤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모님 손에 죽임을 당한 그 소녀도 어떤 면에서는 세이코 못지 않게 불쌍했다. 책장을 덮고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운이 계속해서 남는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정말 잘 읽어진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담담하고 조용해서 더 궁금해 미칠 것 같다. '궁금하지? 궁금하지?'라며 놀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계속 이야기하련다. 계속 따라올래?'라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하루만에 조금 두꺼운 책 두권을 읽어버린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작가의 작풍이라고 해야 하나... 이 작가의 작품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 사람들 모두 자기만의 문제와 비밀을 갖고 있다. 그걸 일일이 다 설명하듯 이야기해주니 한번씩 지루해질 뻔할 때가 있다. 사건을 풀어가는 실마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읽었는데 사실은 사건과는 별 쓸모없는 이야기였다거나 하면 힘이 쭉 빠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소설에도 유부남과 바람피는 젊은 여선생 이야기나 히토시의 엄마 도시코네 집안 이야기는 굳이 그렇게까지 길게 풀어써야 했는지 잘 모르겠다. 좋게 말하면, 작가는 주인공과 주된 사건 뿐만 아니라 그 관련 인물들의 소소한(그러나 그 인물에는 중대한) 이야기들 모두 고루고루 품어주는 것이겠지. 사실 내 눈에 하찮아 보이는 다른 사람의 문제도 그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는 걸 이런 식으로 깨달음을 주는 모양이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 <화차>는 신용카드의 폐해를 이야기에 녹였는데, 여기에는 '공소시효'가 하나의 소재가 된다. 과연 끔찍한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15년으로 정해져 있는 게 올바른 일일까? 15년에서 하루만 지나면 그 살인사건은 없었던 일이 되는 걸까. 아직도 공소시효가 그렇게 정해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이것도 하나의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주말을 보내는 즐거움에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읽는 일은 당분간 빠지지 않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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