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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상속
키란 데사이 지음, 김석희 옮김 / 이레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상실의 상속>. 까만 책 표지에 하얀 글씨로 새겨진 책 제목. 그리고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존재감 확실한 두꺼운 책. 그렇게 이 책은 내게 다가왔다.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화려한 문구 아래 커다란 기대감을 잔뜩 품게 해놓고 첫장을 펼쳤을 때의 그 당혹감이란... 왜냐하면, 이 소설은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커다란 이야기 흐름이 있고, 그 속에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흐름이 있고, 갖가지 사건이 있고, 그 사건들이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친절한 소설이 있는가 하면(나는 그런 소설을 좋아한다. 읽기 편하고 느끼기 편하니까.) 정반대로 독자가 어떻게 읽고 있는지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작가의 머릿속에는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겠지만 미세한 한 부분씩을 사방팔방 왔다갔다 거리면서 툭툭 내뱉어버리는 소설도 있다. 이 소설은 후자에 속했다. 그래서 읽기가 힘들었고,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고, 다 읽고 나서도 이렇게 기분이 찜찜할 수가 없다.
<파이 이야기>, <Q&A>등의 인도 소설의 선택에서 크게 성공을 했고, <연을 쫓는 아이>처럼 제3세계(이 단어의 선택이 그리 유쾌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한국소설, 일본소설, 영미소설 등을 제외하면 나에게는 모두 제3세계 소설이다.) 소설에서도 재미를 봤기 때문에, 그리고 부커상 수상작 이라는 데서 망설임없이 이 책을 선택했건만....
인도 칼림퐁이라는 곳에 사이라는 소녀가 할아버지 제무바이 판사를 찾아간다. 판사는 비주라는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고 열심히 노예근성으로 일하고 있는 요리사와 함께 살고 있는데 제각각 과거가 있는 듯하다. 사이는 가정교사인 지안과 위험한 연애를 시작하고, 판사는 무트라는 애완견에게만 사랑을 줄 뿐, 주위에 벽을 잔뜩 둘러치고 있다. 요리사는 아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돈을 벌고 성공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지만 정작 뉴욕의 비주는 불법체류자 신세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모든 굴욕을 당연하게 여기며 하층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랑받고 사랑하고 상처받고 치유하는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도라는 특정 국가와 그에 속한 다양한 민족들의 역사를 알아야 이해할 만한 상황들이 죽 펼쳐진다. 솔직히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고르카인들의 자유와 민주를 위해 투쟁하는 GNLF단의 이야기도 한참 나오고, 롤라와 노니와 센 부인이 인도의 상황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부분도 꽤 나오지만 다 그냥그냥 넘겨버렸다. 아무래도 여기서 제3세계 이야기를 읽는 나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 같다. 내가 <연을 쫓는 아이>를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나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더라도 주인공 소년들이 겪는 사건과 그 내면심리를 쫓아가며 공감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실의 상속>에 판사나 지안, 비주가 문화적, 종교적인 차이로 겪는 각종 차별이나 내면의 파괴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공감하기 어려운 것들이기 때문에 그저 지루하게 펼쳐진 감정의 조각들로 여겨질 뿐이었다.
책 뒷표지에는 이 소설의 추천사가 실려있는데 그 중에 보스턴 글러브가 쓴 글의 한 문장이다. "<상실의 상속>은 전통적인 내러티브를 전혀 새로운 형태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줌으로써 즐거움을 선사한다." 맞다. 전통적이지 않은, 실험적인 방식의 글쓰기는 신선할지는 몰라도 나같은 보통의 독자를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하지만 툭툭 내뱉는 키란 데사이의 글 속에서 밑줄을 그을 만한 말들이 몇몇이 보이는 것 같아, 언제 다시 한번 정독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