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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석의 아이디어
최범석 지음 / 푸른숲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몇년 전, 케이블 TV에서 <싱글즈 인 서울>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최범석 디자이너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참 멋있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고, 그 때부터 여기저기 나오는 그를 눈여겨 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은 일간지의 '사람사람' 란에 그의 브랜드가 파리의 백화점에 입성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마치 내 일인양 기뻐했다. 마치 내가 미리 이렇게 크게 될 줄 알고 키운 것마냥 으쓱했다. 그런 그가 책을 냈다. 본인의 이름을 당당히 내세운 <최범석의 아이디어>. 안 읽어볼 수가 없겠지?
보통의 성공 에세이처럼 그가 처음 패션디자인이라는 세계에 입문한 이야기, 동대문에서 고생하며 옷 만들고 옷 팔던 이야기, 파리에 진출한 이야기 등이 시간 순서대로 적당한 자기자랑과 적당히 사람들 가슴에 열정이라는 불을 지필 몇 마디 문구를 기대하고 책을 폈다. 사실 그런 이야기가 궁금했다. 화면으로 나오는 멋진 비주얼로는 설명되지 않을 어떤 고독이나, 그의 생각들이 지면위에서는 어떻게 표현될까 싶어서. 하지만 나의 기대는 보기좋게 빗나갔다. 흔한 성공 에세이가 아니었다.
제목 그대로 <최범석의 아이디어>. 그의 디자인과 그의 생각들이 어디서 영감을 얻는지 그의 아이디어 비밀창고를 공개한 책이다. 그는 빈티지에 열광하고, 현대 팝아트 예술에서 톡톡 튀는 영감을 얻고, 음악을 사랑하는 진짜 예술가이다. 비록 그가 좋아하는 것들이 싹다 내게는 너무나 생소한 이름들이었지만. 그래서 마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면서 나와는 전혀 다른 것들을 보고, 즐기고, 느끼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그는 이런 보통 사람들이 입는 옷을 만들고 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거야? 솔직히 동년배인 젊은 남성들은 그의 옷을 입으면서 왜 자신은 이렇게 지루하게, 평범하게 사나.. 생각하지 않을까? 그들은 그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회사와 술집과 집을 전전하는데 비해 이 멋진 디자이너는 파리를 지나 뉴욕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고 앞을 보고 나가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까.
한 인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자원들을 보면서 나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고 생각의 전환을 일으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보았다. 두뇌 그림을 그려보면 최범석은 거의가 옷, 패션이고 또 팝아트, 음악 등등이겠고, 그럼 나는? 인간의 몸은 70%이상이 물이라는데 그럼 인간의 정신에 몇 %는 무엇이어야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그런 것이 있을까?
생소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잔뜩 나오는 책의 앞부분보다는 그가 뉴욕컬렉션을 준비하는 과정이 일기처럼 적힌 뒷부분이 더 재미있었다. (흔한 자기계발서나 성공에세이를 혐오하지만 그래도 재미를 느끼는 건 무슨 심리이지.) 그가 뉴욕컬렉션의 다른 디자이너들의 쇼를 구경하면서 아이디어를 얻고, 솔직하게 비판할 점은 비판하는 것이 재미있게 읽혔다.
"유럽에서 일본은 아시아의 일본이 아니다. 미국이 북아메리카와 별 상관없는 것처럼 일본은 그냥 일본이다."(229쪽)
"일본 디자이너들도 자신을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일본인이다." (229쪽)
파리컬렉션이냐 뉴욕컬렉션이냐 고민하는 중에 나온 글이다. 우리나라도 아시아의 4룡이라느니 철지난 촌스러운 이름 말고 그저 '대한민국'으로, 그저 '코리아'로 우뚝 설 수 있으면 좋겠다. 최범석이 패션분야에서 그 일을 해냈으면 좋겠다. 아직 드러나진 않았지만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해냈으면 좋겠다. 나 역시도.
'디자이너 최범석의 디자인 레슨'이라는 광고 문구처럼 디자인을 공부하려는 젊은이들이 읽으면 딱 좋을 책이다. 하지만 디자인이나 패션과 전혀 상관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새로운 별천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지금 디자이너 최범석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뉴욕컬렉션에서 어떤 성과를 낼지 기대해보라고 큰소리치는 것을 들어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책이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에 사진도 많고 상당히 이쁘다. 종이재질도 좋고, 실려있는 사진들의 자유로운 느낌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