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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 자체 - 40억년 전 어느 날의 우연
프랜시스 크릭 지음, 김명남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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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 자체 : 40억 년 전 어느 날의 우연.
책 제목만으로도 경외심이 생겨 존댓말이 나올 지경이지만,
책의 큰 주제인 ‘정향 범종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또 갸웃한다.
‘이건 뭐 SF소설인가?’
왜냐하면,
정향 범종설은 한 마디로 생명의 기원은 지구 밖이라는 것이다.
운석에서 묻어온 어떤 생명의 씨앗이 지구에 뿌려졌다는 거지.
멍하니 읽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SF영화 한 장면이 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의 첫 장면이 바로 정향 범종설이다.
첫 장면은 ‘엔지니어’라고 하는 인간과 비슷한 외계인이 검은색 액체를 마신 후 물에 뛰어든다.
몸이 완전히 분해되어 물속에 없어진 후,
화면 가득 DNA 모양의 이중 나선이 분열 및 복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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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과학자가 할 얘기인가?
과학서를 쓰랬더니 소설을 쓰고 앉았네라고 치부하기에는 또 저자가 너무 거물이다.
우리가 DNA 하면 생각이 나는 이중나선.
그래,
이거 이것만 나오면 갑자기 생물학자가 빙의하는 그 모양.
저자 프랜시스 크릭은 ‘DNA 이중나선 구조’라는 논문을 써 생명공학 혁명의 깃발을 처음 올린 사람이오,
제임스 왓슨, 모리스 월키스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사람이다.
소설이라도 찰스 다윈만큼이나 생물학의 한 획을 그은 양반이면 뭔가 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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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땅 다 읽은 내가 결론부터 말하면,
책을 덮을 때 즈음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생길 것이다.
너무 경이로워서 무신론자인 내가 신이 어디 숨어있나 두리번거릴 정도다.
책 제목만 보면 뭇사람들도 나처럼,
세포 하나에서 인간이 되는 과정이 신기하지만 그 정도인가?
아니지.
이 정도라면 내 머릿속으로 어떻게든 이해를 했겠지.
그게 아니지.
그 세포를 구성하는 초기 생명의 조각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얘기한다.
그냥 일반 분자가 평범한 일반 화학 반응이 우연의 우연을 걸쳐 DNA가 되고,
그 DNA는 스스로 분열 복제를 시작하며 세포를 만들게 된다.
세포까지 오면 최소한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간까지 되는 것은 뭐 그럴 수 있겠지.
분자로 크게 비유하자면,
그냥 아무런 의지도 없는 길에 있는 돌덩이들이 비바람 맞으며,
우연한 화학반응이 연속을 걸치다 보니 스스로 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팔다리가 쑥 생겨 처자식 만들어 대를 이어가는 꼴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종교가 없는 나조차 신이 정말 있건가 싶을 정도다.
아마 신이 있다면 그건 무구한 ‘시간’ 그 자체일 것이다.
이런 엄청난 우연들을 빼곡히 세워서 돌멩이를 사람으로 만들 정도의 밀집된 우연들.
정말 몇 억 년의 시간이 주어지면,
단순 돌덩이기에도 생명을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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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전체적으로 훑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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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시간과 거리, 큰 것과 작은 것
2장 우주의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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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장은 본격 생명에 대해 얘기 하기 앞서,
우주가 얼마나 넓고,
지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기를 팍 죽이는 역할을 한다.
저자는 지구에 생명체가 있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생명체가 생기는 데 필요한 시간을 한 번 느껴봐라 욘석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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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얼마나 넓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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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오렌지만 하다고 하자. 그렇다면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9m 거리에서 궤도를 도는 모래알이다. 지구보다 11배 더 큰 목성은 태양으로부터 60m 거리에서, 즉 도시의 한 블록 거리만큼 떨어져서 공전하는 체리 씨다. 은하는 오렌지 1,000억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오렌지와 이웃 오렌지의 평균 거리는 1,600㎞다. -3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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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킬로면 대만 정도 거리다.
서울에 있는 오렌지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대만에 있는 오렌지다.
인터넷에서 하는 드립들이 과학에 근거한다고 느끼는 게,
안드로메다가 그나마 가장 가까운 은하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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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넓은 곳에서 하필 지구에 생명체가 어떻게 생겼을꼬.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걸까?
손에 잡힐 수 있는 사물을 통한 비유는 이 책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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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자체가 캄브리아기 시작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에 해당한다고 하자. 대략 6억만 년이다. 그러면 한 페이지는 약 300만 년을 뜻하고, 한 줄은 약 9만 년, 한 글자나 빈칸은 약 1,300만 년이다. 이때 지구의 기원은 책 7권쯤 더 앞선 시점이었을 테고, 우주의 기원(정확한 연대는 대략적으로만 측정된다)은 그보다도 10권 더 앞섰을 것이다. 기록된 인류 역사는 이 책의 마지막 두세 글자 안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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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한 번에 한 글자(글자 하나가 1,500만 년)씩 천천히 읽는다면, 우리가 다루어야 할 시간이 얼마나 광활한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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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팍 죽었으니 인제 생명에 대한 생화학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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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생화학의 통일성
4장 생명의 일반적인 성격
5장 핵산과 분자 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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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에 대한 경외의 눈을 모두 깡그리 거둬 버리고,
단순 화학물질로 보면 결국 핵산과 단백질로 구성된 어떤 것이며,
이것들은 스스로 계속 복제를 할 수 있다.
생명의 속성이란 게 참으로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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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계는 자신의 지침을 직접 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복제에 필요한 장치도 간접적으로 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유전물질의 복제는 꽤 정확해야 하지만, 한편으로 돌연변이가 낮은 비율로 반드시 발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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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들이 평범한 일련의 화학작용이 계속 적절이 이루어지다 보면,
고분자 물질인 핵산과 단백질이 생성된 것이다.
너무나 많은 경우의 수이기 때문에 우리가 재현할 수 없을 뿐.
마치,
주사위 두 개를 굴렸는데 몇백만 번 계속 일이 두 개가 나오는 스네이크 아이가 계속 나오는 확률보다 더하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완전 100% 또라이는 아니란 얘기다.
정말 로또를 연달아 10년간 매주 맞을 확률만 한 우연한 길을 간다면 생명체를 창조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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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원시지구
7장 통계의 오류
8장 다른 적합한 행성들
9장 고등 문명들
10장 생명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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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비밀을 밝혀주겠다는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다.
인지 영역을 밥 먹듯이 벗어나는 얘기들 때문에.
몇십억 년 동안 온 지구 곳곳에서 발생한 화학반응 중 하나가 기가 막히게 우연과 우연으로 딱딱 반응하여 생명이 나온다.
물론 알겠는데 그 우연이란 게 너무 기가 막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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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 마리 원숭이에게 10억 대의 타자기를 주더라도, 우주의 현재 수명에 해당하는 시간 내에 윌리엄 셰익스피어 의 소네트 4행 1연으로 이루어진 정형시 중 가장 대표적인 형식)가 정확하게 타이핑되어 나올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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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목까지 나오고,
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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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밝혀진 지식을 모두 숙지한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일까? 지금으로써는 생명의 발생이 어떤 면에서든 기적이나 다름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생명이 발생하기 위해서 충족 되어야 할 조건이 너무 많기 때문인데,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말자. 상당히 평범한 화학반응들이 적절하게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지구에서 생명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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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SF영화에 나올 법한 외계의 요소로 인해 지구에 생명이 탄생했다는 정향 범종설 주장이 슬슬 그럴싸해 보일 지경이다.
도무지 아무리 영겁의 시간을 줘도 저런 우연들이 계속되는 게 말이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정말 지구에만 생명이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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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진화론에 관한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래,
신은 없지라고 생각이 든다.
Here is 스파르타는 아닌 불가지론!
그런데 이 최초의 생명체에 해당하는 핵산과 단백질이 발생 과정을 읽노라면,
음,
오히려 세상에 창조주라는 게 정말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이롭다.
40억이라는 시간 그 자체가 창조주인 게 아닐까.
창조주라는 게 어떤 형상이 아닌 시간 그 자체가 아니겠느냐는 철학적인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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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설계도를 주어진다 해도 워낙 우연한 산물이 필요하므로,
40억 년을 줘도 인간을 만들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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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그들은 무엇을 보냈는가
12장 로켓의 설계
13장 두 이론 비교하기
14장 다시 생각해보는 페르미의 질문
15장 왜 신경을 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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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저자가 생각하는 정향 범종설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이렇게 접근해 본다.
만약 우리라면 어떻게 다른 은하계로 진출할 수 있을까?
우리 외의 문명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도 역시 같은 생각을 하겠지.
너무 진지하게 하다 보니 SF영화 시나리오 같다고 느껴진다.
요약하면,
질량 때문에 사람은 안 돼요.
한정된 자원이라면 세균을 보내는 것이 적당하다.
현재 로켓 방식으로는 이론적으로 광속의 1/100밖에 속도를 못 내기 때문에 가까운 은하계까지 걸리는 시간이 몇천, 몇 만 년이다.
당연히 그만큼의 연료를 채우기 힘들다.
이 문제에 대해 과학자들의 기발한 상상들이 나온다.
지구에서 레이저를 쏴서 에너지를 공급하는 방식,
얇은 태양광 돛을 만들어 태양광의 흐름을 타서 멀리 까지 보내는 방법 등.
도대체 누가 상상력을 가지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했나.
상상력은 인문학의 전유물이 아닙디다.
과학이 펼치는 상상의 날개는 몇 곱절 더 커 보인다.
생명의 기원부터,
생명을 우주로 보내기 위한 온갖 상상들,
하지만 철저히 과학에 입각한 상상력은 백 년의 고독과 같은 마술적 사실주의처럼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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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끔찍한 부작용.
책은 우주, 생명, 진화 거창하디 거창한 주제를 다룬다.
인지 영역을 넘어서는 우주의 광활한 모습,
어쩌면 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연한 우연으로 만들어진 생명,
거기서 진화 그리고 은하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나타날 미래까지.
이런 것들에 푹 빠지다 보면,
이 우주의 작은 먼지의 흠집안에 껴 있는 때보다 미천한 내 인생!
뭐 이리 아웅다웅 사느냐는 생각이 들면서,
인생 좀 막 살게 된다.
에라이 그냥 술이나 먹자,
에라이 그냥 퍼 자자,
에라이 야식이나 잔뜩 먹자,
회사 일도 귀찮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고 나면 못 노나니.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오히려 인생이 너무 복잡하여,
머릿속에서 잡념들이 광란의 파티를 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읽어 보아라,
경이로운 세계에 압도되고 그 손 바닥위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도 있다.
'나는 누구고, 여기는 어디인가’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