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페이퍼로드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이문영 지음 / 페이퍼로드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2333년, 고조선 건국되다. 


너무나 당연하리만치 쓰여 있어 의심할 생각을 못했다. 2300년도 아니고, 2350년도 아닌 2333년. 무언가 구체적이고, 확증적인 듯한 숫자가 주는 신뢰감 때문이었을까. 어느 것 하나 의심하지 않고 쉽게 넘어가는 나로선 위 문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습관은 여전했다. 따지고 보면, 대표적 고대 청동기인 크레타 문명이 제대로 발생하기도 전인데 말이다. 어떻게 우리는 "고조선이 딱 이 연도에 만들어졌어요"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마늘과 쑥을 강제로 섭취했던 비극적인 어머니를 둔 단군이 건국 연도에 강렬한 집착이 있어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냈을까. 그렇지 않아도 미지 투성인 우리나라 고대사 속 사실들에는 자기 정당화와 단순 사견들이 적절히 섞여 있다. 이에 이문영이 지은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는 우리가 헷갈릴 만한 고대사에 팩트체크를 가한다. 이른바, 동심과 짭들의 파괴랄까.


동심파괴라 한다면, 이 책은 철딱서니 시절 무심코 받아들였던 이야기들에 덮인 예쁘장한 포장지들을 차례차례 뜯어 재낀다. 일례로,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다는 주장엔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싶어 하는 후손들의 욕구가 숨어있다. 무진년설, 갑진년설 등 왔다리 갔다리 하는 기록 속에서 고조선의 생년을 기원전 2333년으로 판결한 건 15세기 인물인 서거정의 <동국통감>이다. 그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살피건대, 요가 일어난 것은 상원 갑자 '갑진'의 일이며 단군이 일어난 것은 그 후 25년 무진의 일이니, 즉 요와 동시에 세워졌다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p. 24)  


서거정은 <동국통감>을 쓰기 8년 전, <삼국사절요>에서 무진년설을 주장했지만, 갑진년설로 급선회한다. 무진년설은 요와 고조선이 동시에 세워졌음을 주장한다. 반면, 갑진년설은 고조선이 후발 주자임을 말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서거정이 갑진년설파로 발길을 돌린 건 성리학적 사고가 반영됐을 가능성이 크다. 세조가 가고 성종이 옴에 따라 더욱더 뜨거워진 성리학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물인 것이다. 따라서, 기원전 2333년 건국설은 확실한 증거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유교란 정체성을 굳건히 다지고자 하는 과정에서 결정된 경우일 수 있다. 


한편, 저자는 누가누가 더 목소리가 큰지로 역사를 쓰고자 하는 자들을 경계한다. 이들은 역사에다 MSG 듬뿍 넣어 탐스럽게 꾸민 것도 모자라 우리는 짱, 너네는 짭이라며 갈등을 조장하는 데에도 선수급이다. 이는 팩트를 기반으로 자아성찰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류의 발목을 붙잡는다. 따라서 저자는 허위와 날조로 점철된 이것들에 핀셋을 들이내민다. 배달의 민족이라던가 환단고기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팩트로만 덤비라는 저자에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배달의 민족을 예로 들자면, 우리를 누구냐고 물을 때 흔히 나오는 답들 중 하나다. 뜻풀이는 다양하다. 조상을 의미하는 배와 빛남을 뜻하는 달이 만나 조상의 빛이 천하를 비친다는 주장도 있고, 단군의 한자인 박달나무 단자에서 배달이 유래됐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배달의 민족을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을 정의한 개념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배달의 민족이란 용어의 출처를 쫓고 쫓다 보면, 20세기 초에 등장한 대종교가 도착점이기 때문이다. 얼핏 떠올렸을 때, 고조선부터 불렸을 법한 배달의 민족은 우리나라 역사를 고려했을 때 신생아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게 저자는 찐에서 짭을 고르고 골라낸다. 이로써 우리는 사실에 가까운 역사를 혹은 자료 부족으로 무어라 할 수 없는 사실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제대로 마주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정치의 요체가 무엇이냐는 제자의 물음에 공자는 정명이라 답했다. 사물의 이름을 정확히 쓰라는 뜻이다. 불의를 불의로 보고, 정의를 정의라 하는 것. 그래야만 바른 논리로 바른말을 통해 바른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 이는 역사에서도 마찬가다. 필연적으로 펜을 잡은 이에 따라 빛깔을 달리하는 게 역사다. 따라서, 하나를 보더라도 정확히 보기 위한 노력이 결부돼야 적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거울 삼아 현재와 미래를 숙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나라 고대사를 바로 보기 위한 참고서다. 말에서 말로, 글에서 글로 전해진 일화들 속에서 누군가의 비유를, 누군가의 정당화를 그리고 누군가의 착각을 사실에서 구별하여 바로 보기 위한 밑밥을 탄탄히 쌓아주기 때문이다.


모처럼 우리나라 고대사를 마주하니 퍽 반가웠다. 국어 교과서를 끝으로 연이 없던 여러 설화들도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은 이들 뒤에 세력 다툼과 힘의 논리가 숨어 있다고 하니, 슬쩍 놀라기도 했다. 다른 역사들을 읽을 때면 당연하게 여겼던 건데, 경솔했다. 한편으론, 정답을 찾고자 하는 교육과정에 따라 역사를 배웠기에 그 틀에 너무 갇혀있지는 않았나 싶었다. 오늘날에도 관점에 따라 여러 갈래로 비치는 게 사실인데, 역사만큼은 하나의 정답을 찾고자 했던 건 아닐련지. 하나의 사건에도 여러 관점이 있고 그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해석들을 우리나라 고대사를 통해 곱씹는 재미가 있었다. 




본 서평은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https://cafe.naver.com/booheong/201900)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를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역사를 알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간혹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 그리고 지금의 우리를 구성하는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들에 무지했을 때 말이다. 후자를 고려한다면, 일본은 홀대받았다. 철천지 원수로도 여겨지는 그에게서 무슨 배울 점이 있겠냐고 토로하는 사람들도 있다. 외침으로 고통받았던 우리나라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이는 그저 우리의 눈과 귀를 막은 채 전진해야 한다고 아우성치는 수준에 불과하다.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선 그 누군가를 철저히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징비록을 읽었을 때, 참 답답했던 구석이 있었다. 임진왜란 전 일본을 다녀왔을 때, 둘로 나뉜 반응 말이다. 누구는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고. 물론 정치적인 이유만 있던 건 아니지만, 당쟁화되어 갈팡질팡하는 상황만 낳은 게 당황스러웠다. 역사에 if는 없다지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던지. 그러다 박훈 교수의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을 읽으면서 나 역시 그 답답한 존재들의 일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짐작이 들었다.


임진왜란과 경술국치. 한반도를 뒤흔들었던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어쩌면 나는 우리를 무너뜨린 상대방에 무지했다. 변명하자면, 일본과 관련해서는 교과서에서 배운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통신사 방문 이후, 일본에 뜬금없이 미국 배가 들이닥치더니 메이지유신이었고, 어느새 그는 한반도에서 떵떵이고 있었다. 왜라는 궁금증보다는 오지선다에 휩쓸려 정답만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 왜라는 궁금증을 통해 조선 침략의 신호탄이었던 일본 근대화의 연유를 찾아볼 수 있게 한다.


책은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의 시대적 배경을 간략히 설명한 후, 유신에서 빼놓을  없는 4명의 인물을 소개한다.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그들이다.  나라의 시스템을 재구성하는  수많은 사람이 티키타카했을 터.   4명 만을 선별했는가 하니, 각자만의 매력이 있다. 왕성한 독서를 기반으로 교육에 힘쓴 요시다 쇼인, 명랑한 현실주의자로 중재에 앞장선 사카모토 료마, 사무라이의 정체성을 위해 죽음도 불사한 사이고 다카모리 그리고 일찍이 서양문물을 보고 근대화에 눈을  냉혈한 오쿠보 도시미치까지. 이들이 벌이는 일들은 극적이다.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조그만   척으로 미국 배에 접근했다가 투옥당했다든지, 구세대의 상징인 사무라이 대장이 목이 잘리던 날에 도쿄에서는 식산흥업을 위해 내국권업박람회가 성화였다는 사실은 일본 역시 근대화로 거듭나는 과도기가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있게 한다. 이처럼 천차만별인 4개의 시선이 메이지유신에서 교차하게 되는 과정은 다채로운 관점에서 유신을 관찰하는  도움을 준다. 


간과했던 일본의 모습이 책 군데군데 서서히 드러나기도 한다. 19세기 일본 열도에는 전쟁으로 공을 쌓던 사무라이 계급의 비중이 오랜 평화로 인해 줄어들고 있었다. 책의 부제처럼 이들은 칼 대신 책을 들었고, 주자학과 명이학과 같은 공부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미래를 위해 오랜 전통과 관례를 끊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해군과 무관한 이들이 서양을 본보기 삼아 해군 양성에 눈독을 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사무라이 정권인 도쿠가와 막부는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했기에, 서구의 접근에 어느 누구보다도 위협을 느꼈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현실적으로 서양과 자신들의 저력을 비교하고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혁명의 과정에서 피 튀기는 상황이 유난히 적었던 것도 주목할만하다. 서로 다른 진영이어도 나라의 미래를 위해 (인맥을 기반으로 한) 상호존중하는 모습은 다분히 인상적이다. 이처럼 일본에서도 근대화에 있어 충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위기가 다가옴을 인정하고 권력을 내려놓거나 체제의 전환을 추진하는 모습이 성장통 끝에 어떻게 일본이 일어섰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메이지유신에 관한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역사는 성찰의 계기임을 깨달았다. 불과 100년 전, 한반도를 초토화시켰던 상대방에게 우리는 얼마나 무지했는가.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한다. 그저 나쁜 놈이라 외치며 무시하려고만 하지 않았는지. 애매한 현실도피는 불행했던 과거를 답습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 반성  합시다"하고 징비록을 써 내렸던 유성룡의 글귀를 오히려 일본인들이 탐독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전쟁에서   썼다고 자만하는  아니라 배움의 자세로 임하는 게 소름이 돋는다. 한편, 우리는 일본을 비롯한 상대방들에 대해 얼마나 알려고 했는가. 여러모로 어수선한 경쟁이 오고 가는 오늘날에 귀찮다는 이유로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하고, 시야를 좁히려고만  느낌이다.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저자는 메이지유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로 일본인의 정체성을 꼽는다. 간혹 일본인은 근현대의 원천인 메이지유신을 토대로 나아갈 길을 찾기도 한다. 민족주의냐 국제주의냐에 따라 요시다 쇼인이 소환되기도, 사카모토 료마가 부름 받기도 한다. 미국은 독립혁명과 파운딩 파더들을 내세우고,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 역시 유구한 역사와 갖은 고초를 이겨내 왔기에 옆나라의 이름난 사건이나 인물들이 마냥 부럽지만은 않다. 다만, 우리나라의 정체성이 무엇이라고 할 만 한지에 대해서는 세간의 관심이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그것의 중요성을 따지기엔 식견이 부족하여 뭐라 덧붙이기에 무리는 있지만, 우리만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면 오늘의 우리가 보다 똘똘 뭉치고, 지나친 정쟁 속에도 나름의 기준을 세워 건강한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본 서평은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https://cafe.naver.com/booheong/200847)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알라딘 크레마 카르타+ + 스탠딩 케이스(블랙) + 보호필름

평점 :
품절


종이책 마니아로서 전자책은 좀 의문이 들었었어요- 그런데 막상 구입하고 나서는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쉽게 꺼내 읽을 수 있어서 평소보다 독서량이 확 늘어난 것 같아요! 고민하시는 분이 있다면 지체 말고 구입하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함마드 평전 - 선지자에서 인간으로
하메드 압드엘-사마드 지음, 배명자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2012년 프랑스의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는 시원하게 벗은 무함마드의 나체가 담긴 만평을 공개했다. 곧 샤를리 에브도는 신성모독을 이유로 여러 무슬림들에게 표적이 되었고, 실제로 2015년 1월 급진주의자들의 총격에 1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테러범들은 자칭 순교라는 성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비판을 받아들이는 자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자기발전의 기초로 삼고, 와신상담의 기회라 여기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기분이 상해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 저자에게 있어 무슬림은 후자에 속하며, 이는 알카에다·IS를 위시한 여러 국제적 분쟁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무슬림들은 왜 인류의 수호자 알라를 등에 업고, 동일한 인간을 제거하는데 힘을 쓰고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수 세기 동안 이어온 무슬림들의 코란에 대한 완고한 자세에서 기인한다. 코란은 불완전한 인간이 기록한 것이고, 전해지는 과정에서 수정과 삭제가 제법 거쳐졌다. 완벽하게 알라의 계시만을 담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또 코란은 7세기의 텍스트로서 해석을 위해선 당시의 시대적·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결국 무슬림들은 코란의 불완전성에 대한 가능성을 인지하고 불가침의 영역으로만 대하는 아집을 넘어선 융통성과 유연함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저자는 입맛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코란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시대에 맞는 해석조차 금하고, 코란을 코란 그 자체로 둘 것을 강조한다.

무슬림이 무함마드를 신성 불가침의 감옥에서 꺼내 인간이 되게 허락할 때 사고의 개혁이 시작된다. 그래야만 무슬림은 스스로 자신의 감옥을 부술 수 있고,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드는 현재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p.318 

이처럼 저자는 신에의해 좌지우지 되는 삶보다 인간 그 자체의 존재로서 영위할 수 있는 삶을 강조한다. 과거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저자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이 조언은 무슬림에게 코란, 무함마드, 알라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심적인 여유를 가질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허나 이 길은 순탄치 많은 않으리라. 저자 자신이 무슬림의 '성스러운' 암살의 대상이 되었으며, 최근에도 순교로 가장한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의 테러가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저자와 같이 대담함을 갖고 이슬람에 대한 자정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필요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사용설명서 - 단 한 번뿐인 삶을 위한 일곱 가지 물음 인생사용설명서 1
김홍신 지음 / 해냄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와 비슷한 부류의 책은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