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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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역사를 알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간혹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 그리고 지금의 우리를 구성하는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들에 무지했을 때 말이다. 후자를 고려한다면, 일본은 홀대받았다. 철천지 원수로도 여겨지는 그에게서 무슨 배울 점이 있겠냐고 토로하는 사람들도 있다. 외침으로 고통받았던 우리나라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이는 그저 우리의 눈과 귀를 막은 채 전진해야 한다고 아우성치는 수준에 불과하다.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선 그 누군가를 철저히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징비록을 읽었을 때, 참 답답했던 구석이 있었다. 임진왜란 전 일본을 다녀왔을 때, 둘로 나뉜 반응 말이다. 누구는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고. 물론 정치적인 이유만 있던 건 아니지만, 당쟁화되어 갈팡질팡하는 상황만 낳은 게 당황스러웠다. 역사에 if는 없다지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던지. 그러다 박훈 교수의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을 읽으면서 나 역시 그 답답한 존재들의 일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짐작이 들었다.


임진왜란과 경술국치. 한반도를 뒤흔들었던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어쩌면 나는 우리를 무너뜨린 상대방에 무지했다. 변명하자면, 일본과 관련해서는 교과서에서 배운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통신사 방문 이후, 일본에 뜬금없이 미국 배가 들이닥치더니 메이지유신이었고, 어느새 그는 한반도에서 떵떵이고 있었다. 왜라는 궁금증보다는 오지선다에 휩쓸려 정답만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 왜라는 궁금증을 통해 조선 침략의 신호탄이었던 일본 근대화의 연유를 찾아볼 수 있게 한다.


책은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의 시대적 배경을 간략히 설명한 후, 유신에서 빼놓을  없는 4명의 인물을 소개한다.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그들이다.  나라의 시스템을 재구성하는  수많은 사람이 티키타카했을 터.   4명 만을 선별했는가 하니, 각자만의 매력이 있다. 왕성한 독서를 기반으로 교육에 힘쓴 요시다 쇼인, 명랑한 현실주의자로 중재에 앞장선 사카모토 료마, 사무라이의 정체성을 위해 죽음도 불사한 사이고 다카모리 그리고 일찍이 서양문물을 보고 근대화에 눈을  냉혈한 오쿠보 도시미치까지. 이들이 벌이는 일들은 극적이다.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조그만   척으로 미국 배에 접근했다가 투옥당했다든지, 구세대의 상징인 사무라이 대장이 목이 잘리던 날에 도쿄에서는 식산흥업을 위해 내국권업박람회가 성화였다는 사실은 일본 역시 근대화로 거듭나는 과도기가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있게 한다. 이처럼 천차만별인 4개의 시선이 메이지유신에서 교차하게 되는 과정은 다채로운 관점에서 유신을 관찰하는  도움을 준다. 


간과했던 일본의 모습이 책 군데군데 서서히 드러나기도 한다. 19세기 일본 열도에는 전쟁으로 공을 쌓던 사무라이 계급의 비중이 오랜 평화로 인해 줄어들고 있었다. 책의 부제처럼 이들은 칼 대신 책을 들었고, 주자학과 명이학과 같은 공부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미래를 위해 오랜 전통과 관례를 끊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해군과 무관한 이들이 서양을 본보기 삼아 해군 양성에 눈독을 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사무라이 정권인 도쿠가와 막부는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했기에, 서구의 접근에 어느 누구보다도 위협을 느꼈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현실적으로 서양과 자신들의 저력을 비교하고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혁명의 과정에서 피 튀기는 상황이 유난히 적었던 것도 주목할만하다. 서로 다른 진영이어도 나라의 미래를 위해 (인맥을 기반으로 한) 상호존중하는 모습은 다분히 인상적이다. 이처럼 일본에서도 근대화에 있어 충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위기가 다가옴을 인정하고 권력을 내려놓거나 체제의 전환을 추진하는 모습이 성장통 끝에 어떻게 일본이 일어섰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메이지유신에 관한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역사는 성찰의 계기임을 깨달았다. 불과 100년 전, 한반도를 초토화시켰던 상대방에게 우리는 얼마나 무지했는가.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한다. 그저 나쁜 놈이라 외치며 무시하려고만 하지 않았는지. 애매한 현실도피는 불행했던 과거를 답습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 반성  합시다"하고 징비록을 써 내렸던 유성룡의 글귀를 오히려 일본인들이 탐독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전쟁에서   썼다고 자만하는  아니라 배움의 자세로 임하는 게 소름이 돋는다. 한편, 우리는 일본을 비롯한 상대방들에 대해 얼마나 알려고 했는가. 여러모로 어수선한 경쟁이 오고 가는 오늘날에 귀찮다는 이유로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하고, 시야를 좁히려고만  느낌이다.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저자는 메이지유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로 일본인의 정체성을 꼽는다. 간혹 일본인은 근현대의 원천인 메이지유신을 토대로 나아갈 길을 찾기도 한다. 민족주의냐 국제주의냐에 따라 요시다 쇼인이 소환되기도, 사카모토 료마가 부름 받기도 한다. 미국은 독립혁명과 파운딩 파더들을 내세우고,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 역시 유구한 역사와 갖은 고초를 이겨내 왔기에 옆나라의 이름난 사건이나 인물들이 마냥 부럽지만은 않다. 다만, 우리나라의 정체성이 무엇이라고 할 만 한지에 대해서는 세간의 관심이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그것의 중요성을 따지기엔 식견이 부족하여 뭐라 덧붙이기에 무리는 있지만, 우리만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면 오늘의 우리가 보다 똘똘 뭉치고, 지나친 정쟁 속에도 나름의 기준을 세워 건강한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본 서평은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https://cafe.naver.com/booheong/200847)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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