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달린다 - 지식공작소 마라톤 1
이안 맥닐 외 지음, 엄진현 옮김 / 지식공작소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저는 1km를 뛰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이 책을 읽고는 자신감을 얻고 조금씩 뛰다보니 이제는 10km는 훌쩍 뛰게 되더군여. 덕분에 10km 마라톤 대회에서 55분이라는 놀라운! 시간으로 뛰었습니다.

초보분들을 위해서 정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즉 40분 걷기 7분 뛰기에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해왔나에 대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운동부족입니다. 부디 이 책과 함께 운동을 습관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제가 책 장수를 하는 것 같은데, 굳이 이 책이 아니라도 초보분들을 위한 책은 많습니다.

또, 노파심에서 말씀 드리는데, 처음에 무리하면 분명히 몸에 신호가 옵니다. 신난다고 마구 뛰지 마시구여, 운동화는 쿠션이 좋고 자신의 발에 잘 맞는 것으로 고르시기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닷가에서 보낸 한 철 문학과지성 시인선 206
문충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전부터 들고 다니며 읽었고, 뒤에 여러명의 새로 알게된 분들 연락처도 적은 이 시집 - 문충성의 [바닷가에서 보낸 한철]을 다 읽었다. 그래서, 혹자는 시집 읽는 것 자랑하냐는 핀잔도 받았지만.

일단 이 시집도 내가 방황아닌 방황하던 12월말에 샀다. 이미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제목을 보니 안 살수가 없었다. 바다. 2년간은 11월에 바다가 갔는데, 작년에는 알바한다며 못 가지 않았는가. 그 바다 가기를 이 책으로 대신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용을 보지도 안보고 바로 샀다.

일단, 시를 처음 읽는데 너무나 느낌이 좋았다. 몇 개를 읽는데, 전에 읽은 황동규 만큼은 못가도 평균 이상가는 즐거움을 주었다. 그 즐거움은 문충성이 <사회>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쏟았고, 그것을 시로서 승화시키는데 약간은 부족함으로서 간혹 끈긴다. 게다가, 컴퓨터에 대해 물만이 많은지 곳곳에 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컴에 빠져 사는 완수로서는 조금 불만. 기쁨 반 즐거움 반 읽다가 너무 감격스러운 것은 마지막에 실린 2개의 연작시 <바닷가에서 보낸 한 철>, <마지막 詩>는 압권이었다.

역시 아무 시나 문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듯 하다. 그나저나 황동규의 시 이후에는 좀처럼 좋은 시를 읽어도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눈만 높아져서 걱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44
박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마 작년 봄일게다. <문학동네>를 읽는데 드물게도 맘에 드는 시가 있었다. 2인칭의 시로 기억이 되는데, 한창 책을 열심이 읽을 때라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서점에서 그의 2권의 시집중에서 하나를 샀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 시집을 읽게 되었다.

100페이지도 안되는 이 얇은 시집은 장난이 아니었다. 자서에 <바람을 번역하던 시절의 기록>이라고 했는데, 시인의 마을에 부는 바람은 이렇듯 다채롭고, 어두운지. 솔직히, 읽으면서 좋은 것은 느끼겠고, 많은 시가 좋다고 표시는 해두었지만, 왜 좋은지 등등은 잘 모르겠다.

대신 시집의 안쪽에 나온 설명으로 나의 느낌을 대신하겠다 : 시인은 존재의 쓸쓸함과 비애에 대해 노래한다. 그의 가볍지 않은 실존적 물음들은 화려한 이미지와 금언적 구절들에 의해 근본적이면서도 아름답게 형상화된다. 특히 그의 시에는 시각적 이미지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낯설은 언어들의 혼합으로 선명하고 강하며 신선한 색깔을 띤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들이 의상만 화려하게 걸친 것은 분명 아니다.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체험과 사유가 도처에서 번쩍거리며 빛을 발한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역시 황동규의 <三南에 내리는 눈>을 계속 의식했는데, <나는 이제...>는 충분히 겨룰만한 시집이다. 혹은 더 뛰어나다. 그리고, 이 사람도 내가 모르는 삶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지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 창비시선 159
양성우 지음 / 창비 / 199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또 하나의 시집을 읽었다. 창작과 비평의 신간을 주욱 보던중 예전에도 이름이 맘에 들었던 양성우의 <사라지는 것은 사람일뿐이다>이다. 시를 쓴 사람은 몇 권의 시집이 있음에도, 고은이 시 해설을 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다.

시를 이야기 하자면, 지겹도록 아름답고, 씁쓸히 황량하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시들이 아름답고, 곱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들으면 사랑이고, 참세상으로 보면 참 세상인 <임>, <당신>을 노래하는 시는 아름답다. 하지만, 대상이 고정되다보니 지겹다. 아직도 우리의 자유와 참세상을 노래하고 있기에 씁쓸하고, 젊은 시인들의 화려하고, 번쩍이는 시 사이에서 그의 이야기는 황량하다.

비록 내가 좋은 느낌으로 시집을 읽었어도 이렇게 좋은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은, 시집의 앞부분을 접하면서 너무나 좋은 느낌이어서, 그 느낌이 끝까지 가기를 바래서이다. 너무 큰 기대를 한 것이다.

나를 기대하게 만든 이 시인은 타고난 시인이다. 그의 노래에서 묻어있는 리듬감과 그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는 절대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남는다 - <사랑은 독인가, 약인가> 하는 구절이. 그래 아픈 사람에게 사랑은 독일 뿐이다.

집에 있는 전자 시집에서 이 사람의 시를 더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지금은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를 읽고 있다. 예전에 그렇게 읽고 싶었었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창비시선 198
조용미 지음 / 창비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략> 나는 내 시를 읽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다. 순간 순간 아득해져서 몇 번이고 시집을 덮었다 읽기를, 그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기를, 그래서 조금, 아주 조금, 그들의 마음을 쓰다듬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중략>
내가 먼저 가지 않은 길은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길이었다. 그 길이 저만치서 나를 바라본다.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그 길이. 길 위에 있는 자, 길 위에 있는자 하는 자들, 영혼이 길 위에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자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미국에서 살면서 가장 아쉬워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한국시를 읽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시를 즐겨 읽던 나에게는 이러한 한국에서 하던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도 - 그곳에서의 생활을 꽤나 힘들게 만든 것들이었다. 드디어 한국에 왔고, 성진이를 기다리는 잠시의 시간동안 책을 한 권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읽었다.

책을 잡는, 그리고 책을 읽는, 그리고 지금 이렇게 책을 다 읽고 가슴팍에 두고 있는, 책장을 넘기며 어떤 시를 읽었나 훝어 보는 이 순간, 언제나 나는 그 싸아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것은 詩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결정체.

이것은 중독성이 강하다. 읽으면 또 읽게 되고, 다음 번에는 좀 더 강한 그것을 기다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를 읽게 된다, 젠장할!--------------------

이렇게 시집을 읽었다고 해서, 내가 시인에 대해서 왈가불가 한다는 것은 사실 사기에 가까운 일이다. 시인의 언어를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의 삶을 이해 못하는 내가 어찌 그것을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저 조용미를 접한 나의 느낌을 말하자면...

시인의 영혼은 숲에 갖혀 있는 것 같다. 그 숲에서 공포감에 때론 불안감에 쫓기고 있다고나 할까? 계속 나오는 닫힌 숲에서의 이야기, 그 숲에서 시인이 본 사물에 관한. (왜 시인은 그곳에 있어야 할까? 시인에 대해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럴 때 크나큰 불행이다.)

새벽 빗소리는 뚝뚝 아는 이의 거처를 지우며 내 방으로 흘러든다 그곳은 검은색으로 휩싸이며 지워진다 내 아는 이의 거처에도 비는 내리겠지만 그 비는 이제 내게로 오지 못한다

이런 시구를 읽었다 <삶이 내게 쓰는 속임수를 나는 알고 있다>. 하나의 충격이상이었다. 그래 나는 삶은 언제나 정직하고 공평할 줄 알았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사람들까지도 모두 잘 사는 그런 사회를 생각했었는데, 삶 자체는 그러지 않은 것 같다. 많은 부분 삶에 나 자신을 떠맡기고, 의지해 왔었는데, 그 넘은 정말 좋은 넘인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다. 저 시구가 나를 일깨워 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