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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지음, 정유광 그림, 김선희 옮김 / 스푼북 / 2019년 6월
평점 :
올리버 트위스트 – 찰스 디킨스(1838년 출간)
19세기 초반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노동자계급과 지주계급과의 사이가 극명하게 벌어졌다.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먹을 것조차 부족해서 길거리에서 구걸하거나 죽어 나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남았던 질문 하나는 “그 시대의 자화상이 아니었을까?” 였다. 역시,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세상이 산업화하면서 오게 되는 부작용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호사를 누리게 해 주지 않았다.
올리버 트위스트.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던 소설이자 유명한 이야기. 언제나 이런 소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비참한 사생아로 태어나서 자신의 운명인지는 몰라도 구빈원 즉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서 자활을 돕는 곳에 버려졌다. 말이 좋아 구빈원이지 영국은 그곳의 사람들을 게으름뱅이들이 모인 곳으로 보고 구제하기는커녕 길거리로 내몰았다. 그렇게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제도가 되어버렸다. 올리버 또한 장의사에게 팔려가듯 하여 그곳에서 온갖 매질과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착취와 아동폭력에 시달렸다.
우리는 가난에서 헤어날 올 수 없는가? 대체 가난의 기준이 무엇인가? 누군가 그러더구먼. 돈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라고 물었더니 그것은 인간에게 10%의 만족감을 준다고 말이다. 가난한 사람이 벼락부자가 되면 처음에는 90%의 기쁨이 급상승되다가 결국 나중에는 체감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다고 말이다.
가난에서 벗어난 올리버 트위스트? 올리버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찾아온다. 그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재산을 가지게 되었고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살게 되었다. 무엇이 이 고아를 웃게 했는가? 런던의 뒷골목 쥐만도 못한 인간의 삶에서 해방돼서 누리게 된 물질적 풍요 때문일까?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인간은 죽을 때까지 가난하다. 세상은 우리에게 진정한 구빈원을 마련하지 않는다. 100억 아니 1000억을 가지고도 가난한 사람이 있다. 물론 스스로는 부자라고 생각한다. 다 자기만족이지, 부자와 가난뱅이의 정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난 오늘도 가난하지만, 부자로 살려고 한다. 우리의 올리버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