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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에서 - 박솔뫼 소설집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평점 :
이번 책은 박솔뫼 작가님의 소설집입니다. 박솔뫼 작가님이 쓴 에세이를 읽고 읽은 첫 작품이라서 선명하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영릉에서>를 읽었습니다.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크게 다가온 작품은 <아오모리에서>입니다. 저자는 에세이에서 일본 작가를 언급하기도 했고, 일본 여행 이야기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 경험을 <아오모리에서>에 반영합니다.
<아오모리에서>를 다 읽은 뒤, ‘타협’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힙니다. 후반부에 ‘나’ 투명한 염소와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염소는 배를 타고 뭍으로 옵니다. 염소들은 같이 뭍에 왔는데 순서대로 내려서 각자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같이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면 왜 무리를 지어서 왔을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염소에게는 자신이 꿈꾸는 초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각자 자신만의 초원을 꿈꿉니다. 바다에는 자신이 원하는 초원이 없기 때문에 뭍으로 와야 합니다. 뭍으로 향하려면 항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여정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일단 공통된 목적지로 향하는 염소들끼리 무리를 지어서 항해한 셈입니다. 서로 뭍에는 자신만의 초원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서로 격려하면서 힘을 아끼면서.
글쎄요. 어떨까요? 염소들은 어쩌면 항해했던 시간을 평화로운 시간이었다며 그리워할지도 모릅니다. 혼자서 자신만의 초원을 발견하거나 구축하기는 어렵다는 걸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힘들기는 했지만 뭉치면 포기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다다른 경험을 떠올립니다. 염소는 뭍에서 뭉치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타협합니다. 자신이 꿈꾸던 초원의 일부만 실현합니다. 무리를 지어 무한한 초원을 차지합니다. 그곳에서 각자 적당히 자신의 구역을 차지하고, 그 구역에서만 자신의 꿈을 실현합니다. 구역을 나눌 때 치열한 타협 과정이 존재했겠지요. 구역을 나누는 방식, 먹이의 분포, 천적의 분포 등을 고려하며 얻기도 양보하기도 합니다. 염소들은 초원에서 살아가며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평화로운 순간을 갈망하면서.
이는 아야가 친구와 피스 한 갑을 다 피우고 헤어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담배 한 개비는 몇 분이면 다 피웁니다. 그 짧은 시간을 더 오래 지속하려고 친구를 만나 담배 한 갑을 피웁니다. 그러고는 헤어집니다. 또 다시 만나서 피스 한 갑을 다 피울 때까지 같이 있겠지요. 염소들과 아야는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셈입니다.
‘나’가 투명한 염소를 느낀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무한한 초원에서 타협하는 과정에 올라타지 못한 염소는 어떻게 될까요? 좁은 공간에서 자신만의 유니버스를 구축하며 지내다 밀려납니다. 존재감을 잃습니다. 무리 속에서 투명한 염소가 됩니다.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초원, 반드시 실현하고 싶었던 초원을 간직한 채 투명해집니다. ‘나’ 역시 투명한 염소와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형태를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투명한 염소는 자신의 형태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무한한 초원에서 무리는 복수로 존재합니다. 그중 한 무리에만 정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여러 무리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존재를, 유니버스를 알려야 합니다. 한 무리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이기만 해도 에너지가 많이 소비됩니다. 여러 무리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당연히 에너지를 충전할 틈이 없습니다. 자신을 돌볼 에너지까지 고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운전대를 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투명한 염소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투명한 염소는 ‘나’의 원초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원초를 놓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투명한 염소와 함께 나아가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화를 갈망하면서 무엇을 하시나요? 평화를 위한 원초는 무엇이었나요? 원초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나요? 만일 그렇다면 원초를 되살리나요? 아니면 바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요? 원초를 벗어나든 벗어나지 않든 선택의 주체가 본인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