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닐 손수건과 속살 노란 멜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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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꿈을 꿉니다. 꿈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꿈을 꾸는 행위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이겠다는 뜻입니다. 경험해 보지 않았으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상상 속에 존재하는 자신이 되려고 노력을 기울입니다.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을 맛보겠지요. 이런 과정은 어떻게 느낄까요.

 

소설에서 다미코는 병원에 병문안을 갑니다. 그곳에서 소원나무를 봅니다. 소원나무에는 소원쪽지가 달려 있습니다. 대체로 병을 낫게 해달라는 쪽지입니다. 다미코가 생각할 때, 환자에게는 병이 낫거나 낫지 않거나 두 가지 가능성만 있습니다. 당연히 환자의 소원은 완치입니다. 그러나 완치할지 어떨지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미코는 소원쪽지를 환자에게 밝은 생각을 하라고 강요하는 요소로 느낍니다. 그래서 소원쪽지를 적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병원에 청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기만 할까요?

 

사람은 심신이 건강해야 원만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다양한 자극을 받으며 꿈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병원을 다닌다는 것은 심신을 다루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자연스럽게 완치에 집중합니다. 꿈은 멀어집니다. 이것을 포기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그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났을 뿐입니다. 완치하면 다시 꿈이 고개를 들겠지요. 그런데 완치되기 전에도 꿈을 떠올릴 때도 있습니다. 치료 경과가 좋을 때입니다. 다시 꿈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희망이 생깁니다. 병이 낫게 해 달라고 직접 소원쪽지를 쓰면서 긍정적 마음이 생깁니다. 환자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버팀목이 생기는 셈입니다.

 

어쩌면 완치는 운에 달린 일인지도 모릅니다. 치료 경과가 좋아도 마지막에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기도 합니다. 전혀 완치할 가능성이 없었는데 기적처럼 완치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실을 환자가 모를 리 없습니다. 완치하지 못하면 자신이 꿨던 꿈도 운이 따라야 꿀 수 있다고 씁쓸해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환자가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면 다미코의 말대로 소원쪽지를 못 쓰게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이 낫게 해 달라는 직접 써 보는 경험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아시나요? 존시는 거친 비바람이 불어도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잎새를 보고 살아갈 희망을 발견하고 완치합니다. 베어먼이 그린 잎새가 살아있는 잎새로 바뀝니다. 존시는 왜 잎새를 보고 희망을 느꼈을까요? 비바람에 떨어지지 않는 잎새를 보아서요? 아닙니다. 베어먼이 잎을 그려주었다는 운 때문입니다. 비바람 속에서도 자신의 걸작을 완성하고 싶었던 베어먼이 그린 잎새. 그 잎새는 소원나무의 소원쪽지와도 동일하지 않을까요? 소원쪽지들을 보면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굳건히 버티는 환자가 나 이외에도 또 있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직접 병이 낫게 해 달라고 쓸 때 그 마음은 확고한 버팀목이 되겠지요.

 

소원나무는 단순히 완치를 바라는 소원쪽지를 걸어두는 나무가 아닙니다. 당신처럼 병 탓에 꿈을 꿀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으니 낙담하지 말라고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맡은 나무입니다. 혼자서 앞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우니 같이 앞으로 걸어가자는 메시지입니다. 누군가 손을 내밀었을 때, 기꺼이 그 손을 붙잡고 같이 걸어가면 어떨까요? 세상은 혼자서 걸을 때보다 같이 걸을 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다미코, 레이, 사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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