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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
야기사와 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평점 :
여러분은 명분을 자주 찾으시나요? 중대한 결정이 필요할 때만 찾는 사람도 있고, 사소한 결정을 내릴 때도 찾는 사람도 있겠지요. 결정은 지금까지 자신이 드러낸 생각과 말, 행동 나아가 신념을 부정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확실한 명분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려는 마음도 이해됩니다.
그 명분이 가장 필요한 시점은 언제일까요? 부정적 감정에 휩쓸렸을 때 아닐까요? 부정적 감정은 집요하게 자존감을 무너뜨려서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 때마다 머리로는 변화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골랐던 길이 끊긴 상황에서 다른 길을 걷는다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새로운 길을 걷다가 끊겼을 때, 명분은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결정이었다는 이유가 됩니다. 인생에서 꼭 필요한 요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부정적 감정에 빠졌을 때, 새로운 길을 걸어갈 명분만 찾으면 되는 걸까요? 부정적 감정을 정리하지 않은 채 서둘러서 새로운 길로 나섰다가 또 다치는 일은 없을까요? 부정적 감정이 선명한데도 일상으로 빨리 복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합니다. 그러는 동안 부정적 감정은 이전에 생겼던 부정적 감정과 뒤엉켜 존재감이 더욱 커집니다. 늪에 빠지는 셈이지요.
다카코는 자신이 사귀던 애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정적 감정에 휩싸입니다. 무기력해집니다. 자신감을 잃습니다. 자존감도 바닥을 칩니다. 이런 다카코를 구원한 곳은 헌책방입니다. 다카코는 헌책방에서 머물며 조금씩 부정적 감정을 정리합니다. 다카코는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잠을 잡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일을 하면서 마음을 달래는 일에 집중하는 셈이지요. 그 시간 동안 마음은 실컷 울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마음껏 욕하고 때리고 흔듭니다. 강도 높은 솔직함에 부정적 감정은 너덜너덜해집니다. 부정적 감정도 경험이기에 잊을 수는 없겠지만, 존재감이 작아집니다.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시작한 헌책방의 일에서 긍정적 감정을 느낍니다. 그렇게 새로운 길을 찾아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 때, 부족한 자신감의 일부를 명분이 채워줍니다. 기억의 정화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명분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자주 사용되는 말이지요. ‘어쩔 수 없이’에서 의지가 포함되지 않을 때 주로 사용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다카코는 헌책방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든 뒤에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을 기다립니다. 명분을 기다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분은 천운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명분을 기다리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