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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괴의 날 ㅣ 정해연의 날 3부작
정해연 지음 / 시공사 / 2019년 7월
평점 :
이 책만큼 뒷맛이 씁쓸한 국내 소설이 있을까 싶어요. 끊이지 않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장면도 씁니다. 하지만 더 쓴 장면이 있습니다. 명준에게서 벗어난 로희에게 자신을 맡겠다고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로희는 그들의 말에 진심이 없다는 사실을 일일이 지적합니다. 이 장면이 뇌리에 콕 박혔습니다.
과거 자식을 낳은 부모에게는 저절로 모성과 부성이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바꿔 말하면 자식에 대한 사랑을 뜻하겠지요. 그렇다면 반대는 어떨까요? 아이는 태어나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갖고 태어날까요? 만약 로희에게 그런 감정이 없었다면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았을까요? 로희만큼 똑똑한 아이라면 영리하게 상황과 사람을 조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로희는 그들을 다 물리치지요. 자신의 감정을 돌보지 않는 태도에 결여된 무엇이 존재한다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타당한 근거로 이루어진 결론과 사실만을 파악할 줄 아는 로희는 그 무엇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그저 명준에게서 느꼈던 무엇을 그들한테서는 느끼지 못합니다. 명준과 동행하면서 로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을 몸소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은 대견하기도 안쓰럽기도 합니다.
아, 이런 지적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부모가 물려준 넉넉한 재산과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영리한 두뇌를 지니고 있어서 로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해요. 과연 ‘명준’이라는 매개체가 없었어도 로희가 그럴 수 있었을까요? 태어날 때부터 사랑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보살피는 사람이 없다면 피어나지 못할 꽃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환경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책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영리한 아이는 영리한 어른아이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