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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masakibooks를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번역서는 내년 즈음에 나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꽤 빠르게 번역서가 출판됐습니다. 문학동네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43년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 마음 속 서랍에 머물다 깨어난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하 <도시>)을 안 읽을 수 없지요.
서점에 가서 책을 발견했습니다. 몹시 두꺼웠습니다. 다 읽으려면 몇 개월은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미스터리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설에서 주인공 ‘나’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끝날 때까지 ‘나’로만 존재합니다. 어쩌면 ‘나’는 이 챕터의 관장일지도 모르고, 저 챕터의 소년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게 만듭니다. 주인공의 정체가 궁금해서 앉은 자리에서 몇 백 페이지를 읽었습니다.
이 책을 다 읽은 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전장에서 쓰러진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말했습니다.
싱클레어, 내 말 잘 들어 봐! 나는 이제 그만 가 봐야 해. 너는 어쩌면 언젠가 나를 다시 필요로 할지도 몰라. 크로머나 아니면 다른 일들 때문에 말이야. 네가 나를 부른다고 해도 이제 나는 말을 타거나 기차를 타고 무작정 올 수는 없을 거야. 그러면 너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데미안> 헤르만 헤세 / 286쪽 / 위즈덤하우스
<데미안>의 모든 등장인물이 싱클레어의 심리를 드러내는 장치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데미안은 자신의 소임을 다 했으므로 싱클레어를 떠난 것입니다. <도시>는 <데미안>의 마지막 장면의 순환 구조를 섬세하게 자세히 보여줍니다.
<도시>에서 ‘나’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스스로 들어갑니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그림자를 분리합니다.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꿈을 읽는 이로서 지냅니다. 그러다 자신의 그림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림자는 웅덩이를 통해서 탈출할 수 있으니, ‘나’에게 다시 하나가 되어 나가자고 합니다. ‘나’는 웅덩이를 통해 그림자만 탈출시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림자와 웅덩이 밖으로 나가면 삶이 기다립니다. 다시 삶을 살 버팀목이 없습니다. ‘나’에게 꿈 읽기 작업만을 요구하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의 시스템에 더 기대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꿈을 읽는 이로서 계속 일하던 ‘나’는 소년의 시선을 느낍니다. ‘나’는 소년으로부터 자신과 하나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나’는 소년과 하나가 됩니다. 그 때부터 소년과 같이 오래된 꿈을 읽습니다. ‘나’는 손의 온기로 꿈을 밖으로 부르고, 소년은 꿈의 의미를 읽습니다. 일체화가 진행될수록 ‘꿈을 읽는 이’로서의 역할 비중이 소년에게 기울어집니다. 이제 ‘내’게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의 역할이 사라진 셈입니다. 이제 ‘나’도 촛불을 불어 끕니다.
독서일지, 일본소설, 무라카미하루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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