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중력에 맞서 - 과학이 내게 알려준 삶의 가치에 대하여
정인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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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깨나 읽는다고 생각하고 또 그만큼 읽어왔는데, 정작 책 그 자체에 대해선 쓰기 어려운 책들이 있다. 그런 책들은 그저 마음에 간직한다. 이 책 <내 생의 중력에 맞서>도 그런 책이다. 책의 감상이랄 게 없다. 그냥 이 책을 기록한다. 그 흔한 추천사 하나 없는 본인의 서문과 본문으로 이루어진 책. 추천사 같은 상투적인 뽐뿌질도 시도하지 않은 책들을 보면 '너가 읽든말든 신경 안 써. 난 끝내주는 이야기를 썼으니 안 읽으면 너만 손해껄~ '이라고 말하는 듯한 까칠감이 느껴진다. 매혹적인 까칠함.

작가의 말만 읽어도 이 책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책날개 저자 소개를 보니 박사논문 주제가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문화의 식민지성이다. 크하, 과학기술을 익히기도 쉽지는 않겠지. 이걸 문화적 요소로 보는 일은 또 다른 분석이 필요할 거고. 근데 나아가 과학기술문화의 식민지성에 대해 얘기하려면 정말 고민 많았겠다. 난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우리에 대해 분석해야 할 요소가 식민지성이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을 가지고 거기까지 갔다니 그 내용은 또 어떨까.

제목도 심상치 않다. 내 몸이라는 물질의 중력이 아니라 생의 중력이라니. 그리고 죽어서 완전 분해되기 이전에 중력에 맞서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의문은 서문에서 풀린다.

"삶은 고통"이라고 합니다. 우리 삶은 죽음이나 질병, 노화, 망각, 사랑, 이별처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우리 인생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초월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해요.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중력이 객관적 실체라면 삶의 고통은 주관적 경험이지요. 인간 삶의 문제를 설명하기에는 과학의 객관적 언어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취약한 주관성을 넘어서기 위해 과학을 열망한다는 것을 모르진 않습니다. 과학을 하는 이유가 객관성을 얻기 위해서고, 그 객관성이 권위와 힘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느끼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개개인의 성격과 취향, 가치관이 반영된 자신만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저는 과학책 읽기와 쓰기는 객관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과학과 인문학의 중간지대 어디쯤 닻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저자 서문

아, 늘 머무르고 싶던 곳이 과학과 인문학 중간지대 어디쯤이었다. 과학은 삭막하고 인문학은 무책임하다. 역사를 전공하고 공대로 다시 입학했을 때 나도 그랬다. 저자는 여러 칼럼과 전작에서 보여주듯 균형감있게 그 중간지대에 닻을 내리고 자유롭게 흘러다니고 있다.

<과학을 읽다>의 주인공이 과학이었다면 후속작은 우리 자신을 주인공으로 살펴보고 싶었어요. '나를 읽다'가 되겠죠. 나를 이해하는 데 과학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과학이 행복, 사랑, 성격, 감정, 기억, 질병, 노화, 죽음 등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들을 살펴보고, 과학이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검토하고 싶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에는 심리학이나 철학에서 사유할 만한 주제를 가지고, 저자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체로 자기 생각을 풀어놓고 관련된 과학책을 추천해준다. 끝까지 경어체로 써서 그런지 내내 차분하다. 그러나 곳곳에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슈를 던지기도 한다. 가령 첫 챕터부터 미국 독립선언문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는 얘기가 틀렸다고 못을 박는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각각 다르게, 불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기반으로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준다.

생물학적 불평등을 인정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입니다.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타인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삶에서 성별과 나이, 질병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겪게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원치 않은 비만, 우울증. 알코올중독 유전자가 관여하고 있습니다. 우성유전학은 스트레스, 학대, 가난, 방치와 같은 나쁜 환경이 유전자에 흉터를 남겨서 여러 세대에 걸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유전자의 횡포에 휘둘려 자신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지요. 우리는 '능력주의'로 사회적 약자를 몰아서울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불행과 불평등을 고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21쪽

내용이 진행되면서 진정한 자아나 존엄한 삶, 죽음이나 노화. 사랑과 양육, 성평등 같은 이슈들이 뇌과학이나 생물학, 물리학이나 의학 등과 함께 어우러진다. '아름다움의 진화' 챕터에서는 젠더차별같은 민감한 이슈와도 과학을 연결시킨다. 폭력적인 숫컷 오리에 맞선 암컷 오리의 생존 전략은 성적 자율성, 배우자 선택의 자유를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으며, 이는 사람의 사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인용하자면 너무 기니까 핵심만 읽어보자면,

우리의 사촌뻘인 고릴라와 오랑우탄은 수컷의 몸집이 암컷보다 두 배 이상 커요...영장류들은 커다란 몸집과 날카로운 송곳니로 암컥과 새끼들을 폭력적으로 지배했습니다. 알파 수컷은 영아살해를 자행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경우 남성의 신체가 여성보다 평균적으로 크지만 다른 영장류들에 비해 현격히 작아졌어요. 남성의 체구는 여성보다 평균적으로 16퍼센트 정도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는 제거되었습니다. 신체크기 차이가 감소하면서 인간사회의 폭력성도 줄어들었지요. 이러한 진화의 방향은 평등한 몸집을 선호하는 여성의 미적 취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2쪽

참고한 책은 다윈의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그리고 리차드 프럼의 <아름다움의 진화>다. 읽어야 할 목록으로 추가. 저자의 관심은 신경과학, 유전, 행복, 성격, 예술로 이어지다가 책 마무리쯤에는 저자가 특별히 아끼는 올리버 색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죽음을 앞둔 그가 쓴 글에서 '인류와 지구는 생존할 것이고, 삶은 지속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며 잔잔한 위로도 안긴다. '나의 뇌' 역시 그의 말에 순응하기로 했다.

나같은 '자발적 멸종주의자(292쪽)'는 흉내도 못 내볼 따뜻한 이야기. 책은 현대의학의 실패한 암치료사례를 통해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제언하며 마무리된다. 역시 그 흔한 저자 후기 같은 것도 없이 저자가 읽어내려간 소중한 참고문헌들을 내놓고 책은 끝난다. 후아, 그냥 한 번 읽고말 책이 아니다.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한 <과학을 읽다>를 챙겨 읽고 이 책으로 다시 돌아와야 겠다. 머리 구석구석이 지적 호기심으로 들쑤셔지고 과학적 지식과 어른같은 사유가 가득한 책. 나도 절로 성숙해질 것 같은 느낌으로 만족감이 넘치는 책. 이 책 덕에 한 동안 우울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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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까는 여자들 - 환멸나는 세상을 뒤집을 ‘이대녀’들의 목소리
신민주.노서영.로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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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을 거치며 마음에 가장 깊이 남아있던 사람은 3월 초, 달리는 택시에서 뛰어내려 뒷차에 치인 후 숨진 20대 여성이었다. 그리 밤늦은 시간(밤 8시 45분)도 아닌데 달리는 택시 안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 여성. 그 공포...이건 여성만 안다. 남성은 무서움을 느낄 필요도 없는 권력이 있고, 그 권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진 남성은 그 권력이 자신에게 있음조차 성찰해본 적 없으므로. 택시기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서로 주고 받은 대화가 착오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공포는 실재하는 생생한 것이니까.

공포심만으로도 여성이 죽을 수 있는 문화가 있는 곳에서 여성들은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 살아남으려고 때로 침묵하고 때로는 생존신고하고 가끔은 목소리도 내면서. 목소리를 내도 잘 들어주지 않는 사회에서.

이번 대선에선 정말 여성들에겐 투표권이 없나 싶었다. 이대남이 정치권에서 호명된 이후, 이름이 부여된 이대녀들. 남성들의 혐오정서를 표로 이용하는 하버드 출신의 한국남성을 보면서, 여성들의 생각이 절실했다. 어디서든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목소리는 선거 막바지에나 울려나왔다. 언론과 정치권이 아예 관심을 안 가지니 스스로 이슈를 만들어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판을 까는 여자들>을 읽게 되었다. 스스로 이대녀를 대변하려는 마음부터 버리고, 정치가 이대녀를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게 만들어야 하지만, 동시에 이대녀를 마음대로 해석하고 하나의 단일집단으로 축약하려는 욕심들에 저항하면서(7쪽), 젊은 여성 세 명이 정치와 사회에 대해 쓴 책. 무조건 반가웠다. 나는 쉽게 선정적인 이슈에나 몰려다니는 언론을 욕했지만, <판을 까는 여자들> 저자 중 로라는 오히려 냉정했다.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나쁜 시민과 가짜뉴스에 피해를 입는 선량한 시민이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믿음 자체는 허상이다. 사실, 어떤 뉴스는 바로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 발견되고 가공되고 확산된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언제나 무지성의 결과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뉴스가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선택한다. 136쪽

'팩트는 주장을 앞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성을 혐오하고 남성우쭈쭈에 앞장서는 언론은 결국 그 왜곡을 원하는 사람들 덕분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양궁선수의 쇼컷 낙인을 조장한 언론 사례를 들면서 사회가, 언론이, 정치가 이십대 여성을 외면한다면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언론과 정치를 만들어나가겠다고 한다. 이들의 노력은 짧은 머리를 한 여성은 공격받는다는 선례를 남기지 않았다(141쪽). 아우 똑똑하고 현명하다.

노서영 또한 이준석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다. 그는 여성혐오를 이용해 남성의 표를 활용했지만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개선할 의지와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69쪽). 신민지 또한 "남성만을 청년으로 상정하고 정치는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여성폭력에 대해서, 기울어진 운동장과 성별임금격차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지지를 얻을 길이 있기 때문이다. 몇 마디의 안티 페미니즘적 발언, 페미니즘에 대한 '손질'시늉은 이미 정치권에서 손쉽게 이대남의 표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으로 통용된다(48쪽)."고 분석하며,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언제나 내 삶을 바꿨던 것은 최악과 차악 중에 선택을 강요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젊은 여성으로서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을 거부했던 순간들이었다(50쪽)"는 말에서는 젊은 여성에게 강요된 '역할'과 예쁨을 주겠다는 남성권력의 보장에서 자유로운 여성의 힘을 느낀다.

판을 깔기 위해 현상을 분석하고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젊은 여성들은, 가족 이슈나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진보적이고 정치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가족 바깥에 가족을 짓자. 사랑해서 구속되고 위험해지고 불평등해지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자유로워지고 사랑하니까 평등해지자(169쪽)'는 의견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한탄하지도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또 오징어게임에서 혼자 살아남고 456억원을 받을지, 아니면 모두 살아남아서 1억원씩 받을지 선택하는 질문에서, 청년들 75%가 후자를 선택했다는 데서 희망을 얻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돈만 바라보고 갈 것 같지만, 이 상식적인 결과를 통해 돈과 바꿀 수 없는 최저선의 안정감 보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우쳐준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이끌려 오는 것은 당연하다(183쪽).

민서영은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많은 젊은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혹은 필연적으로 '결국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거구나'를 익혀버린 세대라고 말한다. 젊은 여성들은 가장 정치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크면서도 정치를 믿고 바꿔야만 한다는 열망이 가장 큰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 계속해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고 정치적인 역할들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목소리도 보태면서 '판을 까는 여성들'을 열렬히 응원한다. 부디 기운을 내고 지치지말고 끝까지 잘 살아남아서 자연사해야 한다(186쪽).

정치판에도, 직장에도, 사회에도, 학교에도 판을 까는 여자가 필요하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아무도 송은이가 연예계에서 여자들의 판을 깔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그는 후배들의 아이디어에 대해 거침없이 "해보자!"고 외쳤고, 그런 시도가 아무도 해치지 않는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에게 주었다...우리가 서 있는 공간에서도 그것이 가능하게 될지 모른다.

언론이 무시하고 정치가 패싱해버린 젊은 여성들의 정치적 의견이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촘촘하게 담겨 있는 책.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바란다. 언제든 귀기울이고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10년 넘게 잠자고 있던 트위터 계정에 로그인하는 걸 시작으로.

권력의 칼이 어떻게 휘둘러질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사실 나는 많이 두렵다. 하지만 확신한다. 상황이 어떻든 여성멸시를 대놓고 시연하며 여성들의 희생을 밑밥으로 깔아 무언갈 해보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결혼율, 출생율이 높아질 것 같은가? 윤석렬이 당선되면 5년 안에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야지, 라는 남성의 글에 달린 여성들의 의견을 제발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를. 여성들은 여성의 인권이 후퇴하면 결혼이 아니라 자살을 합니다, 란 대답에서 그녀들의 심정이 너무나 이해되었다. 부디 힘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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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가 된 남자들 - 페미니즘이 상식이라고 말하는 7명의 남자들
전인수 지음 / 멜랑콜리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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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두루 주변 남자들에게 읽혀야 할 책. 최초로 남성에 대해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책.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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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당한 몸 - 이라크에서 버마까지, 역사의 방관자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이야기
크리스티나 램 지음, 강경이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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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당한 몸이라니. 어떤 몸이 그래야 할까. 제목부터 무시무시한데 내용은 더 참혹하다. 분쟁지역 전문기자로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참상에 대해 보도해온 영국 기자의 인터뷰집. 2차세계대전 성노예 문제(김복동 할머니 얘기도 나온다. 424쪽)부터 21세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성착취까지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촘촘히 담겨있다. 독일 여성에 대한 소련군대의 성폭행, 버마 로힝야 집단학살, 르완다 집단강간, 보스니아의 강간수용소, 보코하람의 나이지리아 여학생 납치, 야디지족 여성에 대한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만행까지, 전세계 전쟁의 역사와 맥락을 공부하기에도 훌륭한 텍스트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많이 괴로웠다. 또다른 전쟁광의 선거승리를 마주하고 온몸이 아플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때에 집어들었던 책이라 꾸역꾸역 읽었다. 어차피 고통스러울 시간이었으니 피하지 말자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을 다져야 했다. 그렇게 남의 불행을 가져다가 내 고통을 벗어나보려고 얄팍하고 가증스럽게 시간을 버텼다. 가령 책은 50페이지도 넘기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이미 그 전에도 충분히 비참한 여성강간피해자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이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그가 제 벨트를 붙잡고는...저를 때리고 후려쳤어요. '너희 야디지족은 불신자니까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어'라면서요. 그리고 제 등을 깔고 앉아서 숨을 쉬지 못하게 했죠. 그는 저를 뒤에서 강간했어요. 그 뒤로 매일 서너 번씩 강간했어요. 그런 식으로 여섯주가 지났어요. 제 삶은 그냥 강간당하는 것이 전부였어요....그가 어느 날 또 다른 소녀를 사올 거라더군요. 저는 조금 편해지겠구나 싶어서 안도했어요. 그 사람이 데려온 소녀는 열살밖에 안 된 아이였어요. 그 날 밤 두 사람이 옆방에 있었는데, 저는 누군가 그렇게 많이 비명을 지르며 엄마를 찾아 울부짖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저 자신을 위해 울었던 것보다 더 많이 그 어린 소녀를 위해 울었어요. 49쪽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기자인 저자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만 얘기하고 싶은지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디지족 강간피해자 로지안은 계속한다. 그렇게 증언이 이어지고, 기록하고, 전파한다. 살인의 위협을 무릅쓰고 증언하는 여자들이 있고, 그렇게 전쟁범죄로서 강간이 최초로 유죄판결 받기도 한다(1998년).

도대체 남자는 왜 여자를 강간하는지, 물으면 답이 나오기는 할까. 답이 있다면 강간을 멈출 수 있기는 할까. 전쟁 상황을 꼭 골라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평상시에도 전세계에서는 강간이 발생하니까. 콩고에서 5만명 넘는 강간피해자를 치료한 의사는 '강간엔 성적인 면이 하나도 없다. 339쪽' 고 단언한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를 쓴 수전 브라운 밀러도 강간이 욕망이나 남성의 성적 충동을 채우는 것과 관계있다는 생각을 일축하고, 강간을 힘의 행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간은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의 상태에 두기 위해 사용하는 의식적 위협과정일 뿐.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배와 착취, 그리고 침묵이다. 그렇다고 남성이 여성만을 강간하는 것도 아니다. 남성은 아이도 동성도 강간한다. 전시 동성강간피해자는 훨씬 더 어두운 비밀에 갇혀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440쪽).

특히 전시에 약탈과 강간은 으레 일어나는 일로 여겨져 본격적인 진상조사나 피해보상, 가해자처벌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여성들은 가까스로 생존한 이후에도 공동체로부터 멸시당하고 조금씩 죽어간다. 강간이 느린 살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런 묵인 하에 남성 전쟁광들은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국가적 이익에 필요하고, 복수도 해야 한다는 다양한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고, 여성들을 강간한다. 로힝야족 집단학살이나 르완다 내전 등에는 제국주의자들이 무책임하게 뿌려놓고 간 피비린내나는 분쟁의 씨앗이 있기도 했다. 전쟁은 누가 일으키는지, 전쟁을 통해 누가 막대한 이익을 보는지,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엄밀하게 따져 전쟁광들을 처벌해야 하지만 대개는 그러기 어렵다. 처벌해야 할 권력자들이 대개 전쟁광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묵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도, 정부 사람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에요. 라모스 대통령부터 지금까지 한 사람도, 우리가 그렇게 빌고 또 비는데도요." 필리핀 전쟁성노예는 말한다. 전쟁을 일으키면서도 사람을 죽이면서도 섹스는 해야 하니, 대대적으로 여자들을 성노예로 꾸려 짓밟았던 일본 정부는 그러니 더 오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 나라 대통령도 안 들어주는 강간당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들이 뭐하러 들으려 하겠는가.

저자의 인터뷰는 용기와 공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질문한다. 저자가 로힝야 난민의 천막에서 강간피해자 여성의 증언을 들을 때였는데, 군인 12명에서 강간당한 이야기, 무릎과 성기에 총을 받은 이야기, 죽기 직전에 살아남아서 치료받았으나 섹스를 하지 않겠다고 하자 남편이 때린 이야기 등을 듣는 와중에 휴대폰을 잃어버린다. 그 휴대폰은 강간피해자 여성의 남편이 주술을 부려 찾아준다. 남편이 훔쳐간 것이 뻔해 보이는데 이 일로 저자는 마음이 많이 상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일을 하거나 이야기를 지어낼까 생각했다.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무엇이 진짜인지 더는 알지 못하는 것일까. 난민촌 소장은 로힝야족 중에는 워낙 정신이 혼란스러워서 살균제를 우유로 혼동하고 마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가. 조금 더, 조금 더 끔찍한 이야기를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어떤 괴물을 키우도록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가? 포위됐던 콩고 동부에서 막 구출되어 비행기에 가득 태워진 벨기에 수녀들에게, 아마 실화는 아니겠지만 "여기에 강간당했고 영어 할 줄 아시는 분 계세요?"라고 외쳤다는 그 텔레비전 리포터와 우리는 정말 다를까? 114쪽

나는 벌써부터 부끄럽다. 경상도와 낡은 세대가 선택한 부정한 권력을 내가 왜 감수해야 하는지 심장이 뜨거워지도록 화를 내다 못해 전쟁강간피해자들의 고통을 이용했으므로. 전쟁이 얼마나 우리에게 먼 이야기인가. 전쟁 성노예 생존자들이 30년이 넘게 아직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귀기울이고 있나. 우선 이 책을 읽어야 한다. 혐오와 차별발언을 일삼을 정권에서 버티고 살아야 하므로, 고통으로 연대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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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
강혜빈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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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점심을 먹으며 시를 읽었어요. 뭔가 입에 들어있는 걸 아그작아그작 씹어삼키며 시를 읽는 일은 점심먹기에도 시를 읽는 일에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어요. 가끔은 씹는 일을 멈추고 멍하니 시집의 그 많은 휑한 공간들을 쳐다보아야 했지요. 특히 성다영의 시를 읽을 때는요. '욕망 없이 너를 좋아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욕망 없이 너를 좋아할 수 없을까(84쪽)' 묻는 시인은 떠날 수 없는 손의 무력감에 대해 저속한 손이라고 말해요. 갑자기 밥 퍼먹는 데 열중한 나의 손을 바라봐요. 저속해요. 식욕이 떨어져요.

'희생 없는 세계(85쪽)' 아름다울 거 같은데 '삶은 쓸모없는 것으로 단단해져가고 살아가기보다 소멸하기'를 생각해야 해요. 밥맛이 줄어들고 식욕이 없어져요. '점심산책(87쪽)'이란 시에선 '인간은 혼자서 혼자가 될 수 없고 음식에는 죽음과 고통이 있다'고 해요. 음...성다영의 시는 그만 읽어야 겠어요.

안미옥의 시에선 좀 달라져요. 거긴 '알찬 하루를 보내려는 사람을 위한 비유의 메뉴판(95쪽)'이 있어요. '너의 앞날은 두유크림파스타처럼 뿌옇고 고소하다'를 시켜요. 제일 비싼 메뉴에요. '너의 오후는 아보카도롤처럼 속이 편하다'를 시키고 싶지만 어차피 뿌연 앞날 고소하면 좋을 거 같아요. 디저트는 '에그타르트처럼 푹 빠지기 쉬운 타임슬립'이에요.

'구즈마니아를 검색하고는 식물을 사러 상점에 가느라 시를 다 까먹어버리면 좋겠다(103쪽)'고 쓴 시 구절 때문에 나도 따라서 구즈마니아를 검색해요. 그리고 600개의 알록달록한 묘지가 있다는 루마니아의 한 마을도 같이 검색해요. 비문에 웃긴 말이 써 있대요.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진도 찾았어요. 루마니아 어를 알 수 없으니 어떤 웃긴 말일지 너무 궁금해져요. 루마니아의 사푼차 마을이래요. 묘지 뒷 편에 이 사람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그림으로 조각해 놓았대요.

그건 그렇고 그 묘지 때문에 몇몇 친구들과 약속했던 일이 떠올라요. 제가 바보같은 표정을 정말 잘 짓거든요. 친구들이 보기만 해도 웃음을 빵 터트려요. 좋은 친구들을 만나면 하루종일 웃겨줘요. 그래서 낄낄거리다 약속했어요. 임종을 맞을 때 꼭 찾아와서 웃겨주기로. 귀가 들릴까. 섬망이 와서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은 되지만 얼굴에 웃음기가 남은 채로 죽어갈 수 있으면 생각만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상황이 안 맞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약속은 했어요.

밥을 다 먹어갈 무렵에 오은 시를 읽어요. 제목은 '그'. '그의 이름은 김성진이다...그는 이룰 성에 참 진을 쓴다. 아마도 성진의 대부분은 참을 이루기 위해 힘쓰고 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김성진이다 참을 이뤄야 하는데 골목 어귀에서 점점 진실과 멀어지고 있었다 모임의 이름 또한 김성진이다 김이 새고 성이 나고 진이 빠지고 있었다 있지도 않은 우리의 우정에 금이 가고 있었다(113쪽)' 남의 우정에 금간 이야기가 그냥 막연히 좋아서 가까스로 혼자 먹는 점심을 끝내요. 아...혼자 점심 먹을 땐 시를 읽지 말아야 겠다, 고 마음 먹어요. 시는 시를 읽을 만한 시간에 읽어야 겠어요. 시를 떠올리는 건 괜찮을 거 같아요. 혼자 점심 먹으며 말이에요. 어차피 시는 시니까요. 시는 모두를 위한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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