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가 된 남자들 - 페미니즘이 상식이라고 말하는 7명의 남자들
전인수 지음 / 멜랑콜리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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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두루 주변 남자들에게 읽혀야 할 책. 최초로 남성에 대해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책.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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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당한 몸 - 이라크에서 버마까지, 역사의 방관자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이야기
크리스티나 램 지음, 강경이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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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당한 몸이라니. 어떤 몸이 그래야 할까. 제목부터 무시무시한데 내용은 더 참혹하다. 분쟁지역 전문기자로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참상에 대해 보도해온 영국 기자의 인터뷰집. 2차세계대전 성노예 문제(김복동 할머니 얘기도 나온다. 424쪽)부터 21세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성착취까지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촘촘히 담겨있다. 독일 여성에 대한 소련군대의 성폭행, 버마 로힝야 집단학살, 르완다 집단강간, 보스니아의 강간수용소, 보코하람의 나이지리아 여학생 납치, 야디지족 여성에 대한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만행까지, 전세계 전쟁의 역사와 맥락을 공부하기에도 훌륭한 텍스트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많이 괴로웠다. 또다른 전쟁광의 선거승리를 마주하고 온몸이 아플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때에 집어들었던 책이라 꾸역꾸역 읽었다. 어차피 고통스러울 시간이었으니 피하지 말자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을 다져야 했다. 그렇게 남의 불행을 가져다가 내 고통을 벗어나보려고 얄팍하고 가증스럽게 시간을 버텼다. 가령 책은 50페이지도 넘기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이미 그 전에도 충분히 비참한 여성강간피해자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이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그가 제 벨트를 붙잡고는...저를 때리고 후려쳤어요. '너희 야디지족은 불신자니까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어'라면서요. 그리고 제 등을 깔고 앉아서 숨을 쉬지 못하게 했죠. 그는 저를 뒤에서 강간했어요. 그 뒤로 매일 서너 번씩 강간했어요. 그런 식으로 여섯주가 지났어요. 제 삶은 그냥 강간당하는 것이 전부였어요....그가 어느 날 또 다른 소녀를 사올 거라더군요. 저는 조금 편해지겠구나 싶어서 안도했어요. 그 사람이 데려온 소녀는 열살밖에 안 된 아이였어요. 그 날 밤 두 사람이 옆방에 있었는데, 저는 누군가 그렇게 많이 비명을 지르며 엄마를 찾아 울부짖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저 자신을 위해 울었던 것보다 더 많이 그 어린 소녀를 위해 울었어요. 49쪽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기자인 저자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만 얘기하고 싶은지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디지족 강간피해자 로지안은 계속한다. 그렇게 증언이 이어지고, 기록하고, 전파한다. 살인의 위협을 무릅쓰고 증언하는 여자들이 있고, 그렇게 전쟁범죄로서 강간이 최초로 유죄판결 받기도 한다(1998년).

도대체 남자는 왜 여자를 강간하는지, 물으면 답이 나오기는 할까. 답이 있다면 강간을 멈출 수 있기는 할까. 전쟁 상황을 꼭 골라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평상시에도 전세계에서는 강간이 발생하니까. 콩고에서 5만명 넘는 강간피해자를 치료한 의사는 '강간엔 성적인 면이 하나도 없다. 339쪽' 고 단언한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를 쓴 수전 브라운 밀러도 강간이 욕망이나 남성의 성적 충동을 채우는 것과 관계있다는 생각을 일축하고, 강간을 힘의 행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간은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의 상태에 두기 위해 사용하는 의식적 위협과정일 뿐.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배와 착취, 그리고 침묵이다. 그렇다고 남성이 여성만을 강간하는 것도 아니다. 남성은 아이도 동성도 강간한다. 전시 동성강간피해자는 훨씬 더 어두운 비밀에 갇혀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440쪽).

특히 전시에 약탈과 강간은 으레 일어나는 일로 여겨져 본격적인 진상조사나 피해보상, 가해자처벌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여성들은 가까스로 생존한 이후에도 공동체로부터 멸시당하고 조금씩 죽어간다. 강간이 느린 살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런 묵인 하에 남성 전쟁광들은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국가적 이익에 필요하고, 복수도 해야 한다는 다양한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고, 여성들을 강간한다. 로힝야족 집단학살이나 르완다 내전 등에는 제국주의자들이 무책임하게 뿌려놓고 간 피비린내나는 분쟁의 씨앗이 있기도 했다. 전쟁은 누가 일으키는지, 전쟁을 통해 누가 막대한 이익을 보는지,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엄밀하게 따져 전쟁광들을 처벌해야 하지만 대개는 그러기 어렵다. 처벌해야 할 권력자들이 대개 전쟁광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묵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도, 정부 사람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에요. 라모스 대통령부터 지금까지 한 사람도, 우리가 그렇게 빌고 또 비는데도요." 필리핀 전쟁성노예는 말한다. 전쟁을 일으키면서도 사람을 죽이면서도 섹스는 해야 하니, 대대적으로 여자들을 성노예로 꾸려 짓밟았던 일본 정부는 그러니 더 오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 나라 대통령도 안 들어주는 강간당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들이 뭐하러 들으려 하겠는가.

저자의 인터뷰는 용기와 공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질문한다. 저자가 로힝야 난민의 천막에서 강간피해자 여성의 증언을 들을 때였는데, 군인 12명에서 강간당한 이야기, 무릎과 성기에 총을 받은 이야기, 죽기 직전에 살아남아서 치료받았으나 섹스를 하지 않겠다고 하자 남편이 때린 이야기 등을 듣는 와중에 휴대폰을 잃어버린다. 그 휴대폰은 강간피해자 여성의 남편이 주술을 부려 찾아준다. 남편이 훔쳐간 것이 뻔해 보이는데 이 일로 저자는 마음이 많이 상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일을 하거나 이야기를 지어낼까 생각했다.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무엇이 진짜인지 더는 알지 못하는 것일까. 난민촌 소장은 로힝야족 중에는 워낙 정신이 혼란스러워서 살균제를 우유로 혼동하고 마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가. 조금 더, 조금 더 끔찍한 이야기를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어떤 괴물을 키우도록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가? 포위됐던 콩고 동부에서 막 구출되어 비행기에 가득 태워진 벨기에 수녀들에게, 아마 실화는 아니겠지만 "여기에 강간당했고 영어 할 줄 아시는 분 계세요?"라고 외쳤다는 그 텔레비전 리포터와 우리는 정말 다를까? 114쪽

나는 벌써부터 부끄럽다. 경상도와 낡은 세대가 선택한 부정한 권력을 내가 왜 감수해야 하는지 심장이 뜨거워지도록 화를 내다 못해 전쟁강간피해자들의 고통을 이용했으므로. 전쟁이 얼마나 우리에게 먼 이야기인가. 전쟁 성노예 생존자들이 30년이 넘게 아직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귀기울이고 있나. 우선 이 책을 읽어야 한다. 혐오와 차별발언을 일삼을 정권에서 버티고 살아야 하므로, 고통으로 연대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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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
강혜빈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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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점심을 먹으며 시를 읽었어요. 뭔가 입에 들어있는 걸 아그작아그작 씹어삼키며 시를 읽는 일은 점심먹기에도 시를 읽는 일에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어요. 가끔은 씹는 일을 멈추고 멍하니 시집의 그 많은 휑한 공간들을 쳐다보아야 했지요. 특히 성다영의 시를 읽을 때는요. '욕망 없이 너를 좋아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욕망 없이 너를 좋아할 수 없을까(84쪽)' 묻는 시인은 떠날 수 없는 손의 무력감에 대해 저속한 손이라고 말해요. 갑자기 밥 퍼먹는 데 열중한 나의 손을 바라봐요. 저속해요. 식욕이 떨어져요.

'희생 없는 세계(85쪽)' 아름다울 거 같은데 '삶은 쓸모없는 것으로 단단해져가고 살아가기보다 소멸하기'를 생각해야 해요. 밥맛이 줄어들고 식욕이 없어져요. '점심산책(87쪽)'이란 시에선 '인간은 혼자서 혼자가 될 수 없고 음식에는 죽음과 고통이 있다'고 해요. 음...성다영의 시는 그만 읽어야 겠어요.

안미옥의 시에선 좀 달라져요. 거긴 '알찬 하루를 보내려는 사람을 위한 비유의 메뉴판(95쪽)'이 있어요. '너의 앞날은 두유크림파스타처럼 뿌옇고 고소하다'를 시켜요. 제일 비싼 메뉴에요. '너의 오후는 아보카도롤처럼 속이 편하다'를 시키고 싶지만 어차피 뿌연 앞날 고소하면 좋을 거 같아요. 디저트는 '에그타르트처럼 푹 빠지기 쉬운 타임슬립'이에요.

'구즈마니아를 검색하고는 식물을 사러 상점에 가느라 시를 다 까먹어버리면 좋겠다(103쪽)'고 쓴 시 구절 때문에 나도 따라서 구즈마니아를 검색해요. 그리고 600개의 알록달록한 묘지가 있다는 루마니아의 한 마을도 같이 검색해요. 비문에 웃긴 말이 써 있대요.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진도 찾았어요. 루마니아 어를 알 수 없으니 어떤 웃긴 말일지 너무 궁금해져요. 루마니아의 사푼차 마을이래요. 묘지 뒷 편에 이 사람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그림으로 조각해 놓았대요.

그건 그렇고 그 묘지 때문에 몇몇 친구들과 약속했던 일이 떠올라요. 제가 바보같은 표정을 정말 잘 짓거든요. 친구들이 보기만 해도 웃음을 빵 터트려요. 좋은 친구들을 만나면 하루종일 웃겨줘요. 그래서 낄낄거리다 약속했어요. 임종을 맞을 때 꼭 찾아와서 웃겨주기로. 귀가 들릴까. 섬망이 와서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은 되지만 얼굴에 웃음기가 남은 채로 죽어갈 수 있으면 생각만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상황이 안 맞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약속은 했어요.

밥을 다 먹어갈 무렵에 오은 시를 읽어요. 제목은 '그'. '그의 이름은 김성진이다...그는 이룰 성에 참 진을 쓴다. 아마도 성진의 대부분은 참을 이루기 위해 힘쓰고 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김성진이다 참을 이뤄야 하는데 골목 어귀에서 점점 진실과 멀어지고 있었다 모임의 이름 또한 김성진이다 김이 새고 성이 나고 진이 빠지고 있었다 있지도 않은 우리의 우정에 금이 가고 있었다(113쪽)' 남의 우정에 금간 이야기가 그냥 막연히 좋아서 가까스로 혼자 먹는 점심을 끝내요. 아...혼자 점심 먹을 땐 시를 읽지 말아야 겠다, 고 마음 먹어요. 시는 시를 읽을 만한 시간에 읽어야 겠어요. 시를 떠올리는 건 괜찮을 거 같아요. 혼자 점심 먹으며 말이에요. 어차피 시는 시니까요. 시는 모두를 위한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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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달리기
조우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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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돈 많은 사람이 진심으로 부러워졌다. 돈 많은 사람이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돈 많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강력한 신분계급과 그 세습이 우리 사회의 강력한 지배구조를 강화하고 빈부격차를 벌리고 있건 말건, 그냥 부자가 되고 싶다.

돈이 많이많이 생기면 공기좋은 너른 땅에 방이 100개쯤은 있는 건물을 올릴 것이다. 각각 방에는 화장실과 서재로 쓸 수 있는 넉넉한 거실, 아담한 침실이 있을 거고, 거실에는 듬뿍 햇살이 들어올 것이다. 단촐한 주방이 있을 테지만 식사는 좋은 식자재와 건강을 고려해 짠 식단이 제공되는 넓은 레스토랑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식당을 꽤 신경써서 만들 거니까. 방으로 배달도 되는 질좋은 술과 안주제공 서비스 및 세탁서비스도 제공할 거고. 다양한 루트의 산책로가 있는 너른 정원이 보이는 곳에 근사한 바도 만들고.

이 건물에 뭔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여성들을 무료로 입주시킬 예정이다. 사람들은 최대 3년까지 집걱정 없이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구체화시킬 행동을 하고, 살 만한 힘을 얻어 나가면 된다. 더 돈이 많다면 하와이나 칠레에 거대망원경 몇 개 사서 천문학자들에게 주고 싶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같은 도서관도 짓고 싶다. 보이스피싱과 화장실 불법촬영 범죄를 없앨 사업에 필요한 만큼 돈을 대주고, 종편을 엿먹일 종편을 설립해 진보적 가치를 구현하려는 언론에게 돈을 펑펑 퍼줄 것이다. 크하하하하하하하 멋지지 않음? 문제는 돈이 사람을 변질시킨다는 것. 그많은 돈을 가진 내가 계속 제정신일 수 있을까? 그 돈을 가지고도 지금처럼 발랄하고 명랑할 수 있을까. 돈만 있으면 하기 쉬운 일들을 그 돈많은 재벌가 자식들은 왜 안 할까.

조우리 연작소설 <이어달리기>에서 나를 내내 매혹시켰던 건 성희의 유산이었다. 말로만 돕는 게 아니라 실제 도움이 되도록 충분히 돈을 썼다. 좋은 어른인 성희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여성들에게 아낌없이 스스로 자신만의 파도에 오르도록, 둘둘둘 커피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되도록, 구르기에 성공하도록, 이어달리며 배턴을 전해받도록 진심을 다해 돕는다. 성희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대가 없이 어린 여성들이 자신의 세계에 다가가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모라 불리지만 진짜 이모의 친구였을 뿐이다. 어떤 이해관계도 없다. 착한 어른이고 시한부 삶을 정리하며 자신의 유산을 적절하게 건낼 뿐이다. 이런 어른을 만난 적 있었던가. 꿈같은 이야기들인데 그저 좋다.

존중받고 환대받은 아이들은 이어달리며 또 근사한 어른이 되어 간다. 빨간 풍선이 달린 설가타거북까지 그 관계를 이어가도록 돕는다. 여성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넘쳐흐른다. 그 사이 사랑과 신뢰가 있고, 편지와 미션이 있다.

성희는 1인실 침대의 머리맡에 작은 사막에서 수영과 거북이 함께 작은 사진을 담은 액자를 놓아 두었다. 기나긴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둘의 모습. 거북에게 빨간 풍선을 매어주던 날. 성희는 거북에게도 미션을 주었다. 수영이를 부탁해. 오래오래 같이 살아줘. 변함없이. 고요하게. 75쪽

성희의 마음은 담백한 행운이나 환타지 같은 환대를 믿지 않는 까칠한 심성소유자인 나의 차가운 마음마저 노골노골하게 만들었다. 자기는 죽어가면서도 거북에게 이런 미션을 주는 이모라니. 성희 이모. 부디 저의 이모가 되어주세요.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늘 성실하게 잘 듣는 역할을 하는 데 익숙한 아름에게 마지막으로 이어진다. 배턴을 건내주지 못하고 이어달리기의 고리를 잇지 못하던 아름은 끝내 미션에 성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그 많은 편지를 보내며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성희의 이야기. 봄이 오기 전에 미리 따뜻한 마음이 되어보고 싶다면 여성들의 이어달리기에 귀를 기울여보시길.

아름이 책을 들고 성희를 찾아갔을 때, 성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아름은 언젠가 성희가 그랬던 것처럼, 성희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이모, 나 미션 완료했어."

"그래? 어떤 보상을 주면 좋을까. 원하는 걸 말해봐."

아름은 기꺼이 대답했다.

"이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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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다
최다혜 지음 / 씨네21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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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릴화의 투박한 붓터치가 이렇게 섬세할 수도 있는 거였구나. 최다혜의 책 <아무렇지 않다>는 선과 면, 색이 만든 다양한 감정들을 진중하게, 섬세하게 쏟아낸다. 소설가 박서련의 '최다혜 작가는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로서도 알지 못하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내가 짓는 표정'이란 말에서 그도 그렇게 느꼈구나, 공감했다. 작가는 결국 자기 표정에, 자기가 보는 자기 비슷한 타인의 표정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얼마나 오래 지켜보아야, 그 속으로 들어가려고 얼마나 노력해보아야, 매끄럽지 않은 선 하나로 이리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걸까. 그림인 걸 뻔히 알면서도 그 눈동자에 뭐가 들어 있는 것 같아 열심히 눈맞춤해본다.

이 책의 표정들만 모아 놓아도 기나긴 이야기 한 편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여기 실린 이야기들은 다 내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바퀴벌레가 쏟아지는 꿈을 견디고, 예기치않은 지출과 느닷없는 불행을 감수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을 결국 받아들이면서 하루하루 꾸역꾸역 살아보는 시간들을 누구든 버텨오지 않았으리. 그렇게 버티면서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묵묵히 또 방법을 찾아나서는 지현, 은영, 지은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너무 쓸쓸한 책이다.

이들의 쓸쓸함은 혼자 버텨낸다는 데 있다. 여성 서사에서 무례하게 끼어들곤 하는 남자친구 따위는 없다. 자립을 위해 버티고 살아내면서 온전히 자기 인생을 자기 것으로 유지한다. 이 쓸쓸함이 언젠가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이 책에서 좋았던 그림. 머리 말리며 지각이다...와 함께 각종 욕을 쏟아내던 기억. 씻고 돈 쓰러가자는 생각으로 설레며 욕실 문을 열던 기억.

2년이나 그렸다는 작가의 그림들이 많이많이 팔려서 이 세상에서 작가가 무던히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무례한 세상 언어에 길들지 않고 홀로 버텨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더 강해지기를.

불행은 늘 초대없이 무례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세상은 불행을 겪는 이들에게 그것이 그들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 말하는 더 큰 무례를 범한다. 불행의 원인이 개인의 무능이라 말하거나...불행해 마땅한 존재로 개인을 몰아세우는 것이다. 살고자 불행과 맞서고 있는 이들에게 세상은 이렇게나 잔인하고 예의가 없다. 정말 속상하는 것은, 불행에 지칠 대로 지친 이가 이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저항할 힘이 없어 스스로 체화하게 되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마라, 스스로 무례해지지 마라'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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