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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당한 몸 - 이라크에서 버마까지, 역사의 방관자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이야기
크리스티나 램 지음, 강경이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평점 :
관통당한 몸이라니. 어떤 몸이 그래야 할까. 제목부터 무시무시한데 내용은 더 참혹하다. 분쟁지역 전문기자로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참상에 대해 보도해온 영국 기자의 인터뷰집. 2차세계대전 성노예 문제(김복동 할머니 얘기도 나온다. 424쪽)부터 21세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성착취까지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촘촘히 담겨있다. 독일 여성에 대한 소련군대의 성폭행, 버마 로힝야 집단학살, 르완다 집단강간, 보스니아의 강간수용소, 보코하람의 나이지리아 여학생 납치, 야디지족 여성에 대한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만행까지, 전세계 전쟁의 역사와 맥락을 공부하기에도 훌륭한 텍스트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많이 괴로웠다. 또다른 전쟁광의 선거승리를 마주하고 온몸이 아플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때에 집어들었던 책이라 꾸역꾸역 읽었다. 어차피 고통스러울 시간이었으니 피하지 말자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을 다져야 했다. 그렇게 남의 불행을 가져다가 내 고통을 벗어나보려고 얄팍하고 가증스럽게 시간을 버텼다. 가령 책은 50페이지도 넘기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이미 그 전에도 충분히 비참한 여성강간피해자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이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그가 제 벨트를 붙잡고는...저를 때리고 후려쳤어요. '너희 야디지족은 불신자니까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어'라면서요. 그리고 제 등을 깔고 앉아서 숨을 쉬지 못하게 했죠. 그는 저를 뒤에서 강간했어요. 그 뒤로 매일 서너 번씩 강간했어요. 그런 식으로 여섯주가 지났어요. 제 삶은 그냥 강간당하는 것이 전부였어요....그가 어느 날 또 다른 소녀를 사올 거라더군요. 저는 조금 편해지겠구나 싶어서 안도했어요. 그 사람이 데려온 소녀는 열살밖에 안 된 아이였어요. 그 날 밤 두 사람이 옆방에 있었는데, 저는 누군가 그렇게 많이 비명을 지르며 엄마를 찾아 울부짖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저 자신을 위해 울었던 것보다 더 많이 그 어린 소녀를 위해 울었어요. 49쪽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기자인 저자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만 얘기하고 싶은지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디지족 강간피해자 로지안은 계속한다. 그렇게 증언이 이어지고, 기록하고, 전파한다. 살인의 위협을 무릅쓰고 증언하는 여자들이 있고, 그렇게 전쟁범죄로서 강간이 최초로 유죄판결 받기도 한다(1998년).
도대체 남자는 왜 여자를 강간하는지, 물으면 답이 나오기는 할까. 답이 있다면 강간을 멈출 수 있기는 할까. 전쟁 상황을 꼭 골라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평상시에도 전세계에서는 강간이 발생하니까. 콩고에서 5만명 넘는 강간피해자를 치료한 의사는 '강간엔 성적인 면이 하나도 없다. 339쪽' 고 단언한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를 쓴 수전 브라운 밀러도 강간이 욕망이나 남성의 성적 충동을 채우는 것과 관계있다는 생각을 일축하고, 강간을 힘의 행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간은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의 상태에 두기 위해 사용하는 의식적 위협과정일 뿐.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배와 착취, 그리고 침묵이다. 그렇다고 남성이 여성만을 강간하는 것도 아니다. 남성은 아이도 동성도 강간한다. 전시 동성강간피해자는 훨씬 더 어두운 비밀에 갇혀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440쪽).
특히 전시에 약탈과 강간은 으레 일어나는 일로 여겨져 본격적인 진상조사나 피해보상, 가해자처벌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여성들은 가까스로 생존한 이후에도 공동체로부터 멸시당하고 조금씩 죽어간다. 강간이 느린 살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런 묵인 하에 남성 전쟁광들은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국가적 이익에 필요하고, 복수도 해야 한다는 다양한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고, 여성들을 강간한다. 로힝야족 집단학살이나 르완다 내전 등에는 제국주의자들이 무책임하게 뿌려놓고 간 피비린내나는 분쟁의 씨앗이 있기도 했다. 전쟁은 누가 일으키는지, 전쟁을 통해 누가 막대한 이익을 보는지,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엄밀하게 따져 전쟁광들을 처벌해야 하지만 대개는 그러기 어렵다. 처벌해야 할 권력자들이 대개 전쟁광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묵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도, 정부 사람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에요. 라모스 대통령부터 지금까지 한 사람도, 우리가 그렇게 빌고 또 비는데도요." 필리핀 전쟁성노예는 말한다. 전쟁을 일으키면서도 사람을 죽이면서도 섹스는 해야 하니, 대대적으로 여자들을 성노예로 꾸려 짓밟았던 일본 정부는 그러니 더 오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 나라 대통령도 안 들어주는 강간당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들이 뭐하러 들으려 하겠는가.
저자의 인터뷰는 용기와 공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질문한다. 저자가 로힝야 난민의 천막에서 강간피해자 여성의 증언을 들을 때였는데, 군인 12명에서 강간당한 이야기, 무릎과 성기에 총을 받은 이야기, 죽기 직전에 살아남아서 치료받았으나 섹스를 하지 않겠다고 하자 남편이 때린 이야기 등을 듣는 와중에 휴대폰을 잃어버린다. 그 휴대폰은 강간피해자 여성의 남편이 주술을 부려 찾아준다. 남편이 훔쳐간 것이 뻔해 보이는데 이 일로 저자는 마음이 많이 상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일을 하거나 이야기를 지어낼까 생각했다.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무엇이 진짜인지 더는 알지 못하는 것일까. 난민촌 소장은 로힝야족 중에는 워낙 정신이 혼란스러워서 살균제를 우유로 혼동하고 마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가. 조금 더, 조금 더 끔찍한 이야기를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어떤 괴물을 키우도록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가? 포위됐던 콩고 동부에서 막 구출되어 비행기에 가득 태워진 벨기에 수녀들에게, 아마 실화는 아니겠지만 "여기에 강간당했고 영어 할 줄 아시는 분 계세요?"라고 외쳤다는 그 텔레비전 리포터와 우리는 정말 다를까? 114쪽
나는 벌써부터 부끄럽다. 경상도와 낡은 세대가 선택한 부정한 권력을 내가 왜 감수해야 하는지 심장이 뜨거워지도록 화를 내다 못해 전쟁강간피해자들의 고통을 이용했으므로. 전쟁이 얼마나 우리에게 먼 이야기인가. 전쟁 성노예 생존자들이 30년이 넘게 아직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귀기울이고 있나. 우선 이 책을 읽어야 한다. 혐오와 차별발언을 일삼을 정권에서 버티고 살아야 하므로, 고통으로 연대할 수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