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Volume 2, No. 4 - Spring 2007
아시아 편집부 엮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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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로 창간 1주년을 맞게 되는 계간 아시아.

매번 받아들 때마다 기대와 설렘을 갖게 되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 컨텐츠가 내게는 때로 신기하게 때로 아주 기이하게 다가오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나라로 여행 가서 새로운 풍물을 보는 것과는 또다른 맛을 안겨 준다. 그러나 이번 호에서는 터키, 대만, 몽골, 한국 여성 4인의 단편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아랍 세계의 대표적 여성 작가인 사하르 칼리파의 산문과 장편 소설 맛보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득불 우리 내부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로서는 난생 처음 읽게 되는 북한 작가의 산문 때문이다. <나의 발자욱>이라는 북한 시인 영재의 산문은 슬프면서도 아련하고 동시에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어떤 민족적 힘과 기운을 느끼게 해 주는 효과를 지녔다. 작가 이름 옆에 영어로 적힌 DPRK라는 국가명칭. ROK DPRK가 같은 한반도 중에서 반쪽만을 지칭하게 되었으며 그 부조리한 상황이 여태까지 지속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회환을 갖기 전에, 작가의 글에서 잘 나타나듯이 이러한 역사적 지각 운동과 같은 억지스러운 단절과 분단의 틈바구니에서 아름다운 비극이 탄생하고 그러한 비극의 주인공이되어 온 몸으로 글을 쓰는, 살아 있는 작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 위안으로 다가온다. "빗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창가에 앉아 나는 난생 처음으로 가슴을 저미는 고독을 체험하였으며 분열의 비극이 나의 일신상에 주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그의 고독은 어떤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의 고독이 아니라 그야말로 투기된 존재로서 재투기되는 실존적이고 역사적인 고독이 아니고 무엇이랴. 예외적인 존재, 잉여적 인간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렇게 전우들이 내 곁에서 하나 둘 사라져갈 때마다 나는 고독의 심연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더 깊이 빠져들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드디여 홀로 남아버린 나는 한밤중에 평양역에 내렸다." 아직 자본주의에 의해 잠식 당하지 않은 최후의 본령으로 남아 있는 북한 땅은 비무장 지대처럼 푸르게 민족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으로 내게는 인식된다. 그 북녘땅의 한 사람이 남쪽바다를 마음속으로 그리며 그리워하고 있다. "나의 발자욱/ 지워질 수 없게 찍혀져야 할/ 그런 땅/ 그런 모래불이 나에겐 따로 있나니/ 위대하고 영광이 찬 빛발을 안고/ 내 어린 시절의 작은 자욱 우에/ 큰 자욱을 덧놓아야 할/ 그곳은 내 고향의 바다가/ 통일된 남해의 모래사장이여라." 오늘 우리의 발자욱은 어디를 헤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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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눈물 - 문학으로 읽는 아시아 문제 팔레스타인
수아드 아마리 외 지음, 자카리아 모하메드 엮음, 오수연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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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중동의 화약고, 건조한 사막, 모래 바람, 폭탄에 널부러진 아이들의 시체들, 이스라엘 탱크에 맞선 민중의 저항... 이것이 바로, 갑갑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아비규환의 소용돌이가 펼쳐지는 지구상 저 왼쪽 지역에 나의 두뇌가 반응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들의 신산한 삶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증언은 여태까지 왜곡되기 이전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우리 의식의 지평에 들어와 있지도 않았다. 알려졌어도 기껏해야 진보 언론의 기사를 통해 파편화되어 알려진 측면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은 보다 전체적인 상을 그리게 해 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힘의 억압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삶을 모색해 나가고 있는지 시공간을 울려 퍼지는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이슬람의 문제는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숨진 윤장호 하사와 고 김선일 씨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제 이미 우리 문제의 일부가 되었다. 미국의 전방위적 세계 전략에 좌우되는 약소국들의 운명을 아랍국들과 우리는 이미 공유하고 있으며 (단, 가해자에 대한 가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서), 그러한 연결성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참된 세계화를 이루는 진보적 발걸음이라 믿는다. 책 말미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이해를 위하여'(한국외대 중동역사 연구교수 씀)라는 지면은 매우 전문적이면서도 일목요연한 팔레스타인 문제의 훌륭한 요약으로서, 작가들의 글을 읽기 전에 미리 읽으면 짧은 시간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개괄할 수 있는 소중한 문서이다. 오수연 씨와 함께 이 책을 편집한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이스라엘의 점령에 저항하면서도 자살폭탄운동에 대해서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 이슬람 율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한 인물로서, 자유화 함께 평화를 지향하는 작가로서의 정신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삶의 주체로서 각인되고 있다. 이들이 처한 삶의 조건은 다른 종교적, 인종적 조건들에 앞선 실존으로서 약자에 대해 갖게 되는 측은지심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담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언이며, 이러한 구체적인 실존의 극한 지대에서 오히려 더욱 종교적 편견과 역사의 굴레가 그 악마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절망의 경계에서 오직 필요하고 기댈 것으로 생성되는 것은 희망이며 그 희망이야말로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삶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숙연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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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 - 전12권 세트
조설근 외 지음, 안의운 외 옮김 / 청계(휴먼필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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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에 따르면, 중국에는 “<홍루몽>은 만리장성과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난 지금 그 문학적 만리장성의 어느 언저리에 있는지 방향감각을 잃었다. 역시 역자에게 주워들은 것으로, 마오쩌둥 주석이 “<홍루몽>은 적어도 다섯 번은 읽어야 그 진수를 알게 된다”라고 했다는데, 그 전체 윤곽을 파악하는 데만 해도 최소한 두 세 번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자연스레 궁금해졌던 것은, 이 대작을 혼자서 써내려 간 조설근이라는 사람 또는 그로써 대표되는 중국인의 정신 세계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몰락한 권문세가의 자제로서 초야에 묻혀 평생을 지냈다고 하는데, 그러한 외적 환경이나 조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요즘 한국 소설 영역에서 삶의 전체성을 담아 내는 장편 소설보다는 산발적인 단편에 치우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번 <홍루몽>의 출간을 계기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홍루몽>에서는 짙은 여인의 향기가 난다 (“야릇한 향내가 코를 쿡 찔렀다. 무슨 향기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으나 온몸에 깊숙이 스며들면서 전신이 구름 위에 둥둥 떠오르는 듯했다”: 제6회에서 인용, “누나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무슨 향기인가요? 아직 한 번도 맡아 본 일이 없는 향기니 말이에요”: 제8회에서 인용). 이와 더불어 갖가지 이미지가 다채로운 빛깔을 드리운다(“보옥의 떼에 보채는 하는 수 없이 옆구리 단추를 풀고 속에 입은 붉은 비단 저고리 염낭에서 아롱진 주옥과 눈부신 황금으로 만든 목걸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제8회에서 인용). 따라서 <홍루몽>을 읽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향기를 ‘맡고’ 그 빛깔을 ‘음미’하는 일이 된다. 이것은 분명 색다른 체험이다. ‘금릉 12채’(남경의 열두 미인이라는 뜻)로 풍부하게 구현된 여성성이 중심에 놓여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소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번 새 번역판의 추천 글을 쓴 서경호 교수는 “대중적 인기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자기성찰과 인생에 대한 관조를 글로 써낼 수 있는 작가의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이 글에서 중국이 유가 사상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는 상식은 일단 깨어진다. 중국인의 외면적인 생활은 유가 사상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내면세계, 혹은 넓은 의미에서의 세계관은 불교와 도교에 의해 지배되는 숙명론에 더 접근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도입부에 불교와 도교를 대표라도 하듯 도인과 스님이 짝을 이뤄 등장하는데, 이 대목에서 저자는 나중에 사람(가보옥)으로 환생하게 될 이 소설의 본래적 주인공인 바위의 입을 빌려 자기 소설의 차별성을 간접적으로 선언한다. “… 지금까지의 이야기책들은 전부 판에 박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그런 케케묵은 냄새는 피우지 않는 것이 도리어 새 맛이 나지 않을까요? … 게다가 도회지의 속된 사람들 가운데는 정치에 관한 딱딱한 책을 즐기는 이보다 인정에 맞고 생활에 가까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 소설을 보면 그 태반이 임금과 재상을 비방하거나 남의 집 아녀자의 행실을 힐난하는 것이 아니면 남녀간의 치정 관계를 취급한 음탕한 이야기들뿐이거든요. 그리고 연애 소설이라는 것은 색정적인 저속한 필치로 더럽고 부정한 것들을 글에 담아서는 젊은 남녀들을 그르치고 있는데, 그 예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지요. 이야기마다 번안이 아니면… 어느 것이나 잡스러운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과연 읽어갈수록 여기 그려진 남녀간의 사랑과 애정 표현, 심리 묘사는 그토록 자연스러워 ‘인정에 맞고 생활에 가까’우며, 자칫 음탕함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 전개를 갈무리하는 ‘절제의 미덕’이 돋보인다. 그리하여 이 소설을 읽는 십 대는 핑크 빛 첫사랑을 꿈꾸게 될 것이며, 이십 대는 무분별한 열정에 가리워진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고, 삼십 대는 더 성숙한 사랑의 완성을 향해 매진할 힘을 얻고, 40대를 비롯한 중년의 사람들은 시들해진 사랑의 감정을 소생시킬 묘약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으로 노년에 이른 사람들은, 책 서두에 언급된, 우주만상의 실체도 필경은 텅 비어 있다는 공(空)에 대한 이치를 더 한층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물 흐르는 듯 줄줄 읽히는 한글 문체 곳곳에 백두산에 핀 꽃송이처럼 자리잡은 북한 말투가 눈길을 머물게 한다 (“돈냥이나마 선심을 쓰면 그 집으로선 솜털 하나 뽑는 거나 다름없지만 우리에겐 허리통 맞잡이가 될 게 아닌가?”: 제6회에서 인용, “그런데 그 절의 스님인가 뭔가 하는 요강 대가리 악당은 어디로 꺼지고?”: 제8회에서 인용). 조선족으로서 베이징에 근거지를 둔 역자가 번역 작업을 시작할 당시 지리적, 외교적으로 가까운 북한의 언어 문화를 1차적 자료로 참고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대목을 만날 때마다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써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는 그 주위에 어린 남다른 의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도 쪽에 치우친 남한 문학이 북녘 사투리와 결합될 때 우리 문학도 온전히 회복될 것이다.

대돈방 화백의 삽화 중에서 가장 뇌리에 남는 것은 제6회에서 습인이 살뜰하게 보옥을 보살피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비슷한 나이이지만, 계급적 차이와 성별을 넘어서는 어떤 애틋한 정이 차고 넘친다. 이 두 남녀의 만남과 여성성을 발휘한 습인의 보살핌은 언제나 모성에 지배 받는 남성의 역설적 연약함 내지는 열등함, 남성을 따뜻하게 보살핌으로써 남성에 대한 자신의 대척적 의미를 확인하는 여성성의 따사로움 사이의 긴장과 보완을 보여 준다.

이 문학적 만리장성의 어느 한 구석에서 한 측면에 집중해 들여다 볼 거리들이 많기 때문에 홍학(redology)이라는 집약적인 학문 분야가 성립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런 학문적 노력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독자들의 일차적 의무는 오직 즐기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과 달리, 전체적 윤곽을 굳이 파악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갈피갈피에서 풍기는 향취와 일화, 풍경, 정물, 현대적 심리 묘사 등을 따라가며 마음껏 즐기는 것이 <홍루몽>을 처음 읽는 사람들의 자유이자 특권이 아닌가 싶다. 꿈은 사실 깨고 나면 다 잊어버리게 마련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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