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 전12권 세트
조설근 외 지음, 안의운 외 옮김 / 청계(휴먼필드)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역자에 따르면, 중국에는 “<홍루몽>은 만리장성과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난 지금 그 문학적 만리장성의 어느 언저리에 있는지 방향감각을 잃었다. 역시 역자에게 주워들은 것으로, 마오쩌둥 주석이 “<홍루몽>은 적어도 다섯 번은 읽어야 그 진수를 알게 된다”라고 했다는데, 그 전체 윤곽을 파악하는 데만 해도 최소한 두 세 번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자연스레 궁금해졌던 것은, 이 대작을 혼자서 써내려 간 조설근이라는 사람 또는 그로써 대표되는 중국인의 정신 세계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몰락한 권문세가의 자제로서 초야에 묻혀 평생을 지냈다고 하는데, 그러한 외적 환경이나 조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요즘 한국 소설 영역에서 삶의 전체성을 담아 내는 장편 소설보다는 산발적인 단편에 치우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번 <홍루몽>의 출간을 계기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홍루몽>에서는 짙은 여인의 향기가 난다 (“야릇한 향내가 코를 쿡 찔렀다. 무슨 향기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으나 온몸에 깊숙이 스며들면서 전신이 구름 위에 둥둥 떠오르는 듯했다”: 제6회에서 인용, “누나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무슨 향기인가요? 아직 한 번도 맡아 본 일이 없는 향기니 말이에요”: 제8회에서 인용). 이와 더불어 갖가지 이미지가 다채로운 빛깔을 드리운다(“보옥의 떼에 보채는 하는 수 없이 옆구리 단추를 풀고 속에 입은 붉은 비단 저고리 염낭에서 아롱진 주옥과 눈부신 황금으로 만든 목걸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제8회에서 인용). 따라서 <홍루몽>을 읽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향기를 ‘맡고’ 그 빛깔을 ‘음미’하는 일이 된다. 이것은 분명 색다른 체험이다. ‘금릉 12채’(남경의 열두 미인이라는 뜻)로 풍부하게 구현된 여성성이 중심에 놓여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소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번 새 번역판의 추천 글을 쓴 서경호 교수는 “대중적 인기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자기성찰과 인생에 대한 관조를 글로 써낼 수 있는 작가의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이 글에서 중국이 유가 사상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는 상식은 일단 깨어진다. 중국인의 외면적인 생활은 유가 사상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내면세계, 혹은 넓은 의미에서의 세계관은 불교와 도교에 의해 지배되는 숙명론에 더 접근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도입부에 불교와 도교를 대표라도 하듯 도인과 스님이 짝을 이뤄 등장하는데, 이 대목에서 저자는 나중에 사람(가보옥)으로 환생하게 될 이 소설의 본래적 주인공인 바위의 입을 빌려 자기 소설의 차별성을 간접적으로 선언한다. “… 지금까지의 이야기책들은 전부 판에 박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그런 케케묵은 냄새는 피우지 않는 것이 도리어 새 맛이 나지 않을까요? … 게다가 도회지의 속된 사람들 가운데는 정치에 관한 딱딱한 책을 즐기는 이보다 인정에 맞고 생활에 가까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 소설을 보면 그 태반이 임금과 재상을 비방하거나 남의 집 아녀자의 행실을 힐난하는 것이 아니면 남녀간의 치정 관계를 취급한 음탕한 이야기들뿐이거든요. 그리고 연애 소설이라는 것은 색정적인 저속한 필치로 더럽고 부정한 것들을 글에 담아서는 젊은 남녀들을 그르치고 있는데, 그 예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지요. 이야기마다 번안이 아니면… 어느 것이나 잡스러운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과연 읽어갈수록 여기 그려진 남녀간의 사랑과 애정 표현, 심리 묘사는 그토록 자연스러워 ‘인정에 맞고 생활에 가까’우며, 자칫 음탕함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 전개를 갈무리하는 ‘절제의 미덕’이 돋보인다. 그리하여 이 소설을 읽는 십 대는 핑크 빛 첫사랑을 꿈꾸게 될 것이며, 이십 대는 무분별한 열정에 가리워진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고, 삼십 대는 더 성숙한 사랑의 완성을 향해 매진할 힘을 얻고, 40대를 비롯한 중년의 사람들은 시들해진 사랑의 감정을 소생시킬 묘약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으로 노년에 이른 사람들은, 책 서두에 언급된, 우주만상의 실체도 필경은 텅 비어 있다는 공(空)에 대한 이치를 더 한층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물 흐르는 듯 줄줄 읽히는 한글 문체 곳곳에 백두산에 핀 꽃송이처럼 자리잡은 북한 말투가 눈길을 머물게 한다 (“돈냥이나마 선심을 쓰면 그 집으로선 솜털 하나 뽑는 거나 다름없지만 우리에겐 허리통 맞잡이가 될 게 아닌가?”: 제6회에서 인용, “그런데 그 절의 스님인가 뭔가 하는 요강 대가리 악당은 어디로 꺼지고?”: 제8회에서 인용). 조선족으로서 베이징에 근거지를 둔 역자가 번역 작업을 시작할 당시 지리적, 외교적으로 가까운 북한의 언어 문화를 1차적 자료로 참고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대목을 만날 때마다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써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는 그 주위에 어린 남다른 의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도 쪽에 치우친 남한 문학이 북녘 사투리와 결합될 때 우리 문학도 온전히 회복될 것이다.

대돈방 화백의 삽화 중에서 가장 뇌리에 남는 것은 제6회에서 습인이 살뜰하게 보옥을 보살피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비슷한 나이이지만, 계급적 차이와 성별을 넘어서는 어떤 애틋한 정이 차고 넘친다. 이 두 남녀의 만남과 여성성을 발휘한 습인의 보살핌은 언제나 모성에 지배 받는 남성의 역설적 연약함 내지는 열등함, 남성을 따뜻하게 보살핌으로써 남성에 대한 자신의 대척적 의미를 확인하는 여성성의 따사로움 사이의 긴장과 보완을 보여 준다.

이 문학적 만리장성의 어느 한 구석에서 한 측면에 집중해 들여다 볼 거리들이 많기 때문에 홍학(redology)이라는 집약적인 학문 분야가 성립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런 학문적 노력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독자들의 일차적 의무는 오직 즐기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과 달리, 전체적 윤곽을 굳이 파악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갈피갈피에서 풍기는 향취와 일화, 풍경, 정물, 현대적 심리 묘사 등을 따라가며 마음껏 즐기는 것이 <홍루몽>을 처음 읽는 사람들의 자유이자 특권이 아닌가 싶다. 꿈은 사실 깨고 나면 다 잊어버리게 마련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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